[스크랩] 수필강좌 - 수필의 모든 것 5
21.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
鄭 木 日
가. 소재를 보는 안목
문학의 소재 발견이나 창작에 있어서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등 5감각(感覺) 기능을 잘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보는 것은 글을 쓰고 싶은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기능을 한다.
숱한 소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제재(題材)로 선택할 것인가? 이는 사람마다의 안목과 경지에 따라 달라지며,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여행지에서 유적이나 풍경을 함께 접했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시각에 따라 보석처럼 빛나는 제재를 얻을 수도 있고, 그냥 스쳐버릴 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백 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사물이나 사건을 보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 문학을 하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다름없다. 18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앞면만, 어떤 사람은 측면만, 어떤 사람은 뒷면만 볼 수 있다. 어떤 사태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일부분만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의 삶을 통한 총체적 경험과 지식 정보를 투과해서 인식하는 행위이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본다고 할 때, 한쪽에서 보는 한, 4면을 보지 못하고 항상 3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꺼번에 어떤 사물에서 얻어지는 측면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에서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고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한 바퀴 돌아야 하며, 공중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피라미드들 그냥 거대한 입방체의 구조물로만 보아선 안된다. 피라미드의 외형만을 보지 않고, 신비속에 가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나무』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가시영역의 것일 뿐, 지하의 불가시영역의 뿌리는 보지 못한다. 또한 나무의 보이는 모습과 접촉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이를테면 햇빛, 바람, 비, 세월, 새, 나무의 일생을 연상해서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닿아있는 세계까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보는 것은 눈을 통한 '가시영역'에만 국한돼 있다. 그리고 가시영역의 대상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수필을 쓰는 법을 깨닫는 일이다.
새를 보면서 단순히 보이는 외양만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구름, 자유, 방향, 바람, 새의 삶, … 이런 불가시 영역의 것까지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꽃의 외양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꽃의 보이지 않는 세계, 꽃씨가 새싹을 튀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햇빛, 물, 바람, 나비 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꽃이 져야 할 때와 의미까지를 보아야 한다.
'본다'는 것은 충동, 발견, 관찰, 탐구와 관련이 돼 있다. '본다'는 행위가 오감과 닿아있을 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다음 동시, 시 한편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살펴본다.
꽃씨 속에는 !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최계락 '꽃씨' 전문>
답답할 땐 귀 대고 / 바다 소리를 듣노라/ 네 목소리 듣는다
격정의 성난 파도/ 어떻게 잠 재웠나
피가 맺혀 뼈가 된 /빠알간 산호초
비늘 고운 물고기떼/ 헤일 길 없는 네 가슴 속
그 세상이 꾸는 꿈은 / 미주알 고주알까지
알고 싶어 슬픈 날엔 / 귀 대고 듣는다
<유안진 '소라 껍질' 전문>
'꽃씨'라는 소재에서 외형적으로 보는 것은, 꽃씨의 모양(생김새)이지만, 이 보이는 것과 접촉해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은 '파아란 잎' '빠알간 꽃' '노오란 나비떼'가 있다. 글쓰는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소라 껍질'이란 소재는 그냥 외형적으로는 한낱 조가비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바다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성난 파도, 천길 물속, 헤아릴 길 없는 네 가슴속을 응시하고 들을 줄 아는 눈과 귀를 가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소재를 발견하였다고 하여, 단번에 글이 씌어지지 않는다. 이 소재를 면밀히 관찰하여 속속들이 알고나서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오랜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소재와 친근해지지 않으면 그 소재가 지닌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컨대, 어떤 집에 할아버지가 정성껏 기르던 난초에 꽃이 피었을 때, 할아버지에게선 1년만에 감격과 전율을 느끼는 큰 일이 되겠지만, 무관심했던 다른 가족들은 감격하지 않는다.
미지의 별 하나를 찾기 위해 밤마다 망원경으로 우주공간을 탐색했던 천문학자가 드디어 새로운 별을 찾아냈을 때, 충격과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처럼 관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좋은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곧 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 소재와 대화를 나누고 정을 들여야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사회학자, 법률학자, 의사, 생물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는 각각 자신의 학문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 할 것이다. 보는 법과 시각을 달리한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과 안목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움과 개성이 빛을 말한다.
보는 법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이치를 깨닫는 일이며 글을 쓰는 법을 깨치는 것이 된다.
가시영역의 것만 보지 않고 불가시 영역의 것을 보는 법, 가청 영역의 것만 듣지 않고, 불가청 영역의 것도 듣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보는 법'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
*바깥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본다.
*시(時), 공(空)을 초월해 본다.
*정면에서만 보지 않고 거꾸로 본다.
*일시적으로 보지 않고 오랫동안 본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본다.
*형식만 보지 않고 내용을 본다.
사물을 보는 눈썰미가 있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과 해석과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나. 미래 수필의 개척 방향
(1) 퓨전수필
수필은 영상 정보화 시대, 변화의 시대의 삶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20세기 영상 정보 시대의 문학 형태는 인쇄 매체로서의 틀에서 벗어나 대중과 영합하려는 시도와 몸부림을 생존적인 차원에서 보일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퓨전(fusion) 수필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본다.
좋은 하나의 예를 미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내공간에 회화, 조각품을 전시해 놓고 관객들을 기다리던 소극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이젠 대중들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종전의 평면적이고 실내 전시에 국한했던 권위적 자세에서 벗어나 대중들 속으로 전시 공간을 전방향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술 행위는 종래의 '그린다' '붙인다' '긁는다' '뿌린다' 등의 표현 기법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소리치고, 체험하게 하는 동적인 형태까지를 수용하는 다양성을 취하고 있다. 표현 기법의 다양성뿐만 아니고, 미술과 다른 예술 장르와의 통합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미술+문학, 미술+영화, 미술+음악, 미술+사진, 미술+건축 등이 이뤄지고 있으며 2개 이상의 타장르와의 결합 형태도 있다. 이벤트 미술, 설치미술이라 불리는 이런 새로운 미술장르는 꾸준히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으며 시청각성을 살리고 있어 영상시대 예술로서의 가치를 추구한다.
권위적이고 정적인 미술이 어떻게 이런 변모를 보이는가? 이것은 생존을 위한 시대적 변화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문학의 경우에도 인쇄 매체만을 고집할 시대가 아님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시, 소설, 수필, 희곡이 고전적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영상시대의 대중과의 만남 자체가 용이하지 않다.
21세기엔 문학 장르간의 통합이 활발하게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예컨대, 시+소설, 시+수필, 시+수필, 시+희곡, 소설+수필, 시+소설+수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문학 장르간 2∼3개의 통합이 이뤄질 때, 수필의 역할이 증대할 것으로 예측된다. 시, 소설, 희곡의 경우는 일정한 형식과 구성의 엄격한 적용을 받지만, 수필의 경우는 자유스런 형식의 문학이다. 장르간 결합때 이 자유스런 공간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은 문학 장르간의 통합을 주도할 것이며. 형식과 구성의 다양성과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문학 장르를 여는 촉진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영상시대에 문학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쇄매체의 시각화뿐만 아니라, 영상성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미술 장르의 변화에서 보듯이 타예술 장르와의 결합 형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필에 있어선 이미 미술수필, 음악수필, 건축수필, 영화수필, 사진수필 등이 시도되고 있고, 타예술장르와의 결합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음악+문학, 미술+문학, 미술+영화, 미술+사진, 무용+문학의 결합을 상정해 볼 때, 시나 소설보다 그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는 수필 쪽이 효용성 다양성 개방성이 있어서 유용하리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앞으로 퓨전수필이 대두될 것으로 전망된다.
(2) 5매 수필
'장편(掌篇)'이란 '극히 짧은'이란 뜻이다. 단편소설보다 짧은 장편 소설은 있었지만 장편(掌篇)수필의 대두는 근래의 일이다. 윤오영의 '달밤'이나 피천득의 '오월'은 5매 내외로써 장편수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굳이 '장편수필'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수필과 비평'지는 2001년부터 장편수필을 기획하여 1년이 넘게 게재함으로써 처음으로 장편수필의 전개를 보여주었다. '촌감단상(寸感斷想)'이란 명칭으로 제51호에 김시헌, 정봉구, 정진권, 정목일, 안재진, 제52호에 구자분, 유병근, 장생주, 최병호, 허창옥, 제53호에 반숙자, 박재식, 심영구, 황다연, 제54호에 김수봉, 맹난자, 박영학, 이재인, 정진채의 작품이 선보였다. '수필과 비평'지는 계속해서 장편수필을 청탁하여 게재하고 있다. '새 천년 한국문인'지에서도 기획특집으로 장편수필을 게재한 바 있다
장편수필의 대두에 대하여 문단의 구체적인 반응으로써 '월간문학'지 출신 수필가들의 모임인 '대표에세이문학회'에서 2002년도 연간집을 '5매수필'로 하기로 결의하고, 세미나의 주제를 '5매 수필'의 개척과 방향'으로 잡은 것이 본격적인 논의의 시초이다.
대표에세이문학회에서는 '장편(掌篇)'이란 단어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분량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5매 내외가 적당한 하다는 합의를 도출하였다. 따라서 '장편수필'이란 애매한 개념 대신에 명확한 개념인 '5매수필'이란 말을 붙이기로 했다. 장편수필의 전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편수필'의 불분명한 분량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정리가 필요한 것이므로, 대표에세이문학회에서 규정한 '5매수필'이란 용어에 대해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수필과 비평'지의 장편수필의 게재와 대표에세이문학회의 5매수필 연간집 발간은 본격적인 장편수필의 전개를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왜 5매수필의 전개가 대두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수필의 분량은 대개 15매 내외로 비교적 짧은 산문이기에 현대인들이 읽기에 적당하다. 시의 장점과 소설의 장점을 두루 취하면서 독자적인 개성을 드러내는 수필은 시와 소설의 중간 거리에서 가장 경제적인 효능을 인정받아 대중문학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런데도 3분의 1로 줄여 5매 정도의 분량을 취할 까닭이 있는 것일까?
짧은 수필의 요구는 '속도'를 가치화 하는 시대적 추세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으로 본다. 독서의 경향을 보더라도 대하소설이나 장편소설이 차츰 퇴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반면, 만화나 간단한 읽을거리, 짧은 분량의 글을 선호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시간절약의 경제성이 스피드한 생활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의 삶과 부응하는 면이 있으며, 5매 내외의 분량은 전철이나 여행 중에서도 시간적 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짧은 글 속에 함축된 심오한 사상과 값진 체험, 인생적 발견과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장편수필의 매력이다. 5매 내외의 글은 독자들에게 눈의 피로나 마음의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에 열독성이 있고 경쾌감을 주기 마련이다. 실제로 신문을 볼 경우에도 뉴스 벨류에 따라 톱뉴스의 제목과 부제에서부터 시작하여 필요하다면 본문을 읽어 가는 방식이 신문 읽기의 통례이다. 간결과 축약을 바라고 있다. 이는 모든 면에서 경제성을 요구하는 현대인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요인들이 수필의 분량을 더욱 짧게 요청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고, '5매수필'의 전개를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3) 기행수필
근래에 기행수필이 많이 발표되고 있다.
GNP의 증가, 해외여행의 증가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행할 때는 여행하지 않을 때보다 시간이 가득한 느낌을 가진다. 한 순간에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체험의 수용방법으로서 '여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미지에 대한 기대와 흥분,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깨달음 등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인생을 총체적으로 생각해 보게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준다.
삶에 새로운 자극과 활력소를 제공하며 안목을 높여준다.
기행수필의 진가는 일과성적 체험을 통하여 영원을 수용하며, 동·서 문화,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찰라와 영원, 인간과 환경을 동시에 살필 수 있어 미래의 삶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체험일지라도 글로서 기록하지 않으면 망각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기행수필은 독자들에게 삶의 양식, 방법, 문화, 제도, 풍물에 대한 인식, 다양성, 충동, 창의성을 경험하게 한다. 또한 기행문은 작가의 세상과 인생을 보는 관점, 발견법 그리고 해석법을 보여 주며 적나라하게 자신을 노출시킨다.
기행수필은 인생의 안목과 체험 공간을 최대한 확대시켜준다는 점에서 좋은 기행수필은 독자 들에게 신선함과 즐거움을 안겨준다.
앞으로 삶의 질(質)을 높이고 체험공간의 확대를 위해서 기행수필이 늘어날 것이고 점차 수필 장르의 한 축을 이루면서 수필문학의 활로를 열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에 발표되고 있는 대부분의 기행수필들은 '본대로 느낀대로'의 주마간산(走馬看山)식 겉훑기에 불과한 글들이 많고 내면을 투시한 깊이 있는 기행수필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여행안내 수준의 상식성에 그친 기행문이 많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래에 발표되고 있는 기행수필들을 살펴보면 여행안내서나 안내자의 설명에 의존한 부분이 많고, 단편적인 감상과 지식을 혼합시킨 게 대부분이어서 감흥을 일으키는 글을 찾기가 어렵다. 소설가 강석경씨, 법정스님의 인도기행 수필집을 비롯하여 전숙희씨의 소련기행 수필집 등과 최근 출판사의 기획에 따라 이집트, 몽골, 지중해 등지의 기행수필집들이 간행되어 기행수필의 새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으로 기행수필의 진수를 보여준 것으로 폴 브린튼의 「인도명상기행」「이집트의 신비」를 비롯하여 알베르 카뮈의 「안과 겉」, 장 그리니에 산문집 「섬이 고독한 이유」를 들 고 싶다.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비롯한 문화답사기 등은 문화유적과 문화재에 대한 안내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작가의 깊은 체험과 명상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기행수필문학」의 범주에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바람직한 기행수필의 전개와 방향을 모색해 본다.
① 관점과 테마를 가져라
기행문을 쓸 때 대개의 작가가 출발에서 귀환까지 '본대로 느낀대로' 쓰겠다는 의도를 지닌다. 이런 집필태도와 발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떤 관점과 시각에서 볼 것이며 테마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정하여야만 기행수필의 방향과 목표가 뚜렷해진다.
목표설정이 없으면 안내자의 설명과 여행안내서 내용 등이 조잡하게 삽입될 뿐 만 아니라, 작가의 주관과 견해가 결여돼 주체성을 잃게 된다.
본대로 느낀대로 쓰는 것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전공분야와 탐구분야를 살려 테마를 설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며, 일관된 시각으로 관찰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살피려다 보면 겉 훑기에 그치고 만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② 전문성과 탐구성이 있어야 한다.
문화기행, 경제기행, 민속기행, 문학기행, 미술기행, 종교기행, 풍물기행 등 전문성과 탐구성이 있는 테마기행수필이 많이 나와야 한다.
문화기행을 하려고 한다면 동·서양의 비교적 관점에서 볼것인가, 문화사적 관점에서 살필 것인가, 문화비평적 관점인가, 혹은 문화 양식적 특성을 찾을 것인가 등을 결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전문가나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나 견해를 넣어서 다각적인 시각을 수용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③ 구성이 있는 기행수필
일기형식의 기행문을 쓸 것인가, 아니면 소주제별로 쓸 것인가, 시간별로 쓸 것인가, 장소별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구성을 생각하면서 전체적인 주제성과 조화성을 살려야 한다.
④ 개성적인 문장
개성적인 문장의 구사가 중요하다. 기행수필에 있어서 작가 특유의 개성적 문장이 빛을 발해야만 생동감을 얻게 된다.
작가 자신의 느낌과 사물에 대한 해석, 그리고 인생의 총체적 체험의 산물로서 얻어지는 정감으로 흠뻑 적셔 놓아야만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근래에 발표되는 기행수필의 단점, 취약점은 작가의 통찰력과 느낌, 견해, 정감, 발견의 세계가 적다는 것이다.
이러한 취약성은 체험의 폭이 좁은 점, 전문성 결여, 문장력의 부족에서 나타난다.
⑤ 사실(본대로)과 감상(느낌)을 균배하라
기행수필엔 기록성이 바탕이 되고 있지만, 작가의 느낌과 견해가 중요하며 기록과 감상이 적절히 균배되어 조화를 얻어야 한다.
본대로(사실)에 치우치면 기록문에 가까워지고 느낀대로(감상)에 치우치면 감상문이 되기 쉽다. 기행문은 새로운 대상과 경험을 쓴 글이므로 사실성과 감상을 조화시키고 여기에 인생에 대한 해석을 가미시켜야 한다.
⑥ 관찰, 탐구, 해석이 있어야
한 번 스쳐가면서 일별하는 것으로 좋은 기행수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순간적이고 일과성적 살핌으론 한계가 있다. 대상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면 투시가 있어야 하며 관찰과 관조가 뒤따라야 한다.
여기에 탐구와 명상이 곁들여져야 하며 인생과 결부된 작가의 해석이 요구된다. 일과성적인 살핌속에 깊이있는 관찰과 해석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작가의 전문적인 안목과 통찰력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⑦ 독특한 체험과 흥미
기행수필에 있어서 전문적인 탐구에만 몰입해 있다면, 독자들의 폭넓은 호응을 받기가 어렵다.
인간적인 체취, 뒷골목의 풍경, 잘 드러나지 않는 이색지대, 독특한 풍물, 음식, 벼룩시장, 지역주민과의 친교와 대화, 삶의 양식과 모습 등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여행 중에 실수나 사건 등이 어우러질 때 기행수필의 진미가 우러날 것이다.
(4) 테마수필
앞으로는 테마수필의 전개가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신변잡사의 나열, 평범한 생활기와 감상 등은 개성과 참신성을 얻지 못해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독자적인 주제와 소재를 통해 전문수필가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수필가는 보다 전문적이고 독자적인 세계와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고 평생 탐구할 수 있는 테마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관성있는 테마를 갖는 것이 당면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테마수필이 정착되어야 수필문학의 새 시대를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 鄭木日 : 1945년 경남 진주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수필당선(同誌 최초), 1976년 현대문학 수필추천 완료(同誌 최초),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회장(現), 경남문인협회장(現), 수필집 '마음꽃 피우기'(청조사), '대금산조'(동학사), '별이 되어 풀꽃이 되어'(문학세계사), '만나면서 떠나면서'(현대문학사), '별 보며 쓰는 편지'(고려원), '가을금관'(선우미디어), '나의 해외문화 기행'(문학관) 등 10여권이 있다.
22. 수필문학의 현황과 과제
安在珍
저에게 주어진 논제는 수필문학의 현황과 과제입니다. 참으로 포괄적이고 방대한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의미 깊게 파악하려면 상당한 연구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천한 저로서는 감히 여러분의 기대나 요구에 충족할 길은 없고, 다만 평소 생각했던 몇 가지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논의하고자 합니다. 우선 한국의 수필 문단이 처한 외적 현상은 어느 자리에 서 있으며, 수필 문학이 지닌 내적 본질은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짚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과제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제 사견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외적 현황을 들자면 수필인구는 과연 얼마나 될것이며 그들의 역량은 또한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를 냉철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문협에 회원으로 등록된 수필가는 1530명이었습니다. 한국 문협 총 재적 회원이 6663명인데 시, 시조, 소설, 희곡, 수필, 아동문학, 평론, 번역, 등 8개 장르를 감안할 때 수필 인구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닐 것입니다. 아니, 시인이 3천 40여명을 감안할 때 시 장르 다음으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한국문협 등록 회원만으로 정확한 문학인의 통계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문협등록 자체가 강제성이 없는 만큼 이와는 상관없이 다른 단체나 동호인회를 통해 작품활동을 하는 문학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수필전문지만 하더라도 한국수필, 에세이 문학, 현대 수필 수필문학, 창작 수필, 수필과 비평 등 수많은 수필 전문지가 월간, 격월간 계간으로 출간되고 또한 지방화 시대를 맞아 각 지역마다 종합문예지나 수필전문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현상입니다만, 이들 문예지가 추천 혹은 공모형식으로 배출하고 있는 숫자를 감안할 때 한국문협에 등록된 인원의 두배, 다섯배에 이르리라고 생각됩니다. 일단 수필 작가의 양적 확산에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성공적이라 일컫는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어떤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이상 많은 사람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학의 토양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언어를 생활의 수단으로 유지하고 있는 만큼 누구에게나 문학의 정서는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문한인과 지방생, 그리고 독자가 구분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문학의 구성원 일수 있습니다.
즉 문학이 지향하는 이상은 인간을 완전한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자유, 더욱 광범위한 행복, 더욱 안정된 평화, 더 두터운 여유,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내적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학문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라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문과학은 어찌 보면 인간의 어느 한 면을 연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과학은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를,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고 종합하는 정도로 총체적이고 파상적인 인간문제 접근에는 미흡하거나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학이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업적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지 문학자체로 사회개조의 직접적인 방법은 어느 곳에도 가용될 수 없으며 굶주린 자나 병든 자, 억압받거나 소외된 자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학을 하는 것은 인간을 단편적으로 파악하려는 다른 학문과는 달리 총체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끊임없는 고뇌와 사유 진정한 인간의 태도와 세계의 인식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본래적 자아를 인식시키고 진실과 아름다움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작업을 하므로서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얻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직접적이고 현상적으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울림으로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상작가가 가상세계를 그리므로서 문명을 북돋우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카타르시스처럼 인간의 비극을 세척하여 새로운 쾌감을 일깨우는 것이 문학일진데, 결국 문학은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형태로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핵이요 근원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때문에 문학에 근접하는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오늘의 수필 문단 현실을 두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전기한 문예지를 통해 추천 혹은 공모 형식을 통해 배출되는 수필가를 보면서 과연 능력이 검증되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미진한 채로 등단되었다면 그 자체에서 파생되는 수필문학의 질적 저열은 물론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수필인들의 몫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전연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문제는 비단 수필문단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마찬가지로 고민하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독자의 눈에 서툴게 각인되면 비록 등단의 절차를 밟았다 해도 작가나 작품은 소외 될 것이고, 한 때 주목받은 작가라 해도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작품을 발표하였다면 그는 또 다른 각도의 비판과 검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문단이란 조직이나, 소수의 의지에 국한된 등단 절차는 한국 사회만이 지닌 일종의 병폐일지도 모릅니다.
얼핏 생각하면 조직 속의 질서로 보일 수 있으나 좀더 크게 눈을 뜨면 질서 속의 무질서를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마치 정치 조직처럼 소수의 특권층을 구성하고, 그들 속에서만이 작가를 배출할 수 있다는 묵시적 권한 자체가 문학이 지향하는 자유와 이상에 배치된다는 견해입니다. 그렇다고 전연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작금의 실태로 볼 때 대부분의 수필문학 지망생들은 나이가 찬 분들입니다. 이는 문학을 향한 이론 습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창작에 투신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문학을 위해 가슴앓이를 한 사람이 많았다는 말처럼, 가슴 한 쪽에 털어 내지 못한 미련으로 남겨둔 채 세월에 쫓기고 생활에 부데끼다가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후 어느 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비로서 찾아낸 것이 문학에 대한 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불혹의 나이에, 혹은 지명 이순의 나이에도 등단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수필문단에 그런 문인이 많으냐 하는 문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수필이 문학이냐 아니냐하는 세간의 비상식적 논쟁과도 직간접으로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론 습득의 과정을 생략한 터에 수필은 아무나 쓸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 수필은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쓰면 된다는 오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여 늦게 출발한 문학지망생들이 수필 쪽으로 몰려들었고, 그런 분위기를 비하하여 문학성 시비를 몰고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이나, 같은 문학인이면서도 여백의 글이란 이름으로 수상집을 발간함으로서 수필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 탓인지 수필은 곱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것도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의 책임 없는 말이 아니라 같은 문학인이 시비의 빌미를 제공할 때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홰 수필이 매도되어야 하는지.
지난 시절 한문으로 쓰여진 작품도 고전 문학으로 통찰하고 있으며, 닫힌 세상을 살아온 여인들의 애절한 사연을 적은 글도 가사문학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펜클럽도 분명히 에세이를 포함하여 명명한 것을 볼 때 분명히 세계적인 공의를 얻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수필과 에세이는 개념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동질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이를 문제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필이 문학의 시비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런 안목을 가진 당사자를 의심할 일이지 결코 수필 자체를 응시할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말은 장르 차체가 시비나 우열의 대상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능력이나 창작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문학적 전문성을 지녀야 가능하다면 수필인 역시 전문성을 지녀야 좋은 작품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소설가나 시인이기 때문에 문학성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쓸 때만이 존중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필가이기 때문에 문학의 변방을 서성거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쓰지 않았기에 존중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성이 없이도 수필을 쓸 수 있다는 그릇된 수필관은 수필인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할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김광섭씨의 수필문학소고에 나타난 그릇된 문학관을 마치 잠언처럼 받아드린 대서 오늘날까지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지금도 그런 관점을 여과 없이 옹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문학이란 논지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의 단초는 수필이란 용어 자체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좀더 설명 드리면 수필이란 말은 용제수필에서 나타나는데, 문제의 대목은 의지소지 수즉기록 인기선후 무복전차 고목왈 수필(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先後 無復詮次 故目曰隨 筆)이라는 내용입니다. 풀어쓰면 생각이 떠오르면 선후에 기인하거나 차례에 구애되지 않고 엮었으므로 고로 제목을 수필이라 하였다. 즉 첫머리의 수즉 기록이란 말은 수시로 기록하였다는 의미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필이란 단어로 응축시킨 것이지 결코 붓가는 데로 따라 쓴다고는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어 사전에도 (어떤 양식에도 구애되지 않는 산문 문학의 한 부분, 인생과 자연에 대한 수상, 단상. 논고, 잡기 등이 포함되며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형식 없이 쓰인 글. 개성적, 관조적, 인간성이 내포되게 위트, 유우머, 예지, 기지, 로서도 표현됨. 만문, 산록 에세이로도 칭)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은 지금까지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수필관의 기반은 바로 수필인 들의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필이 허구를 배제 하는 특성이 있는 만큼 소재는 신변잡사나 생활 언저리에서 채굴 할 것인데 그것들이 문학이냐 잡문이나 하는 것은 작가가 고뇌한 문학성 예술성 심미성이 얼마만큼 완성되었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열한 작가정신에서 묻어 온 문장의 완성, 예술적 형상화 대상이나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천착등 문학이 추구하는 제반 문제에 충실했을 때 바람직한 작품이 창출되고, 그런 작품이 수필문단의 주류를 이루었을 때만이 문학의 비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더구나 늦게 출발한 작가가 많으므로 기반이 허술하고, 기반이 허술한 만큼 더 많은 각고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김유정의 동백꽃이 시나 소설로서 장르적 특성을 잘 살렸다면 이양하의 나무나 피천득의 오월도 나무랄데 없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언 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늦게 출발한 작가라 해서 창작성을 의심받는 것이 아닐 진데 좀더 고뇌하고 사색하고 탐미한다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공이 가마에서 작품을 꺼낼 때 멀쩡해 보이는 것도 가차없이 부셔 버립니다. 자신이 의도한 예술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피와 땀을 쏟아 붓고도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 예술일진데 어찌 붓 가는 데로 쓰는 것이 예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겠습니까.
결코 수필문학의 과제는 한마디로 좋은 글을 쓰는 것입니다. 창작 당사자의 목숨을 건 창작정신이 필요하고, 중견작가들은 새롭게 얼굴을 내민 신진작가들을 향해 제 얼굴에 침 뱉기 식으로 현실을 외면하거나 질타할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으로 충고하고 독려하여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이나 예술분야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유도되는 처지입니다. 육필문학에서 인터넷 문학으로, 복잡하고 깊이 있는 쪽에서 가볍고 단순한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추세를 감안할 때 수필은 반드시 미래 문학으로서 당당한 입지가 마련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23. 그리운 靑山行
김성복의 수필집『추령별곡』을 읽고
홍억선(수필가)
1
수필집『추령별곡』을 펴낸 김성복님은 문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널리 작품활동을 해온 분은 아니다. 우연히 필자와의 만남을 전후해서 그것도 고희를 넘기고 본격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으니 굳이 그의 筆歷을 따진다면 한 3년쯤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수필집 추령별곡을 여느 文士가 끄적여 놓은 晩年의 파적거리쯤으로 여긴다면 천부당한 생각이다. 삶의 순간마다 다양한 언어로 표시하여 온 퇴적의 기억들을 수필이라는 그릇으로 온전히 옮겨놓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선 짧은 시간에 그 많은 기억들을 흠결 없이 다듬을 수 있었던 작가의 에너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자전적일 수밖에 없는 내용의 한계를 넘어 수필이 되게 한 문학적 역량도 반가웠다.
추령은 감포에서 경주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이다. 고개란 무엇인가. 세상에 태어나 평생 동안 고개를 넘을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울타리 정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나 더 큰 세상을 동경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넘어야할 출구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높은 추령을 넘어 도시로 나오는데 17년이 걸렸다고 한다. 처음에 십 리 길을 조심조심 벗어나 보았고 다음에는 이십 리를, 결국 평생의 길을 추령 밖에서 보낸 작가가 대종천의 가시고기처럼 이제 추령을 되넘어 그 유년의 울타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2.
원론적이지만 문학의 기능은 쾌락과 교훈에 있다. 쾌락은 즐거움을 말한다.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재미가 없으면 외면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수필에서 줄곧 재미만 추구한다면 통속적인 잡문이 되고 만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인 장치로 교훈의 기능을 추가해 놓은 것이다. 문학에서 교훈의 기능은 삶의 진실을 일깨우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김성복님의 작품들은 이 두 가지의 문학적 기능에 매우 적절히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작가의 이력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유년의 지독한 가난, 그리고 교사, 장교, 세무사로서 직업, 사랑, 가정, 晩學 등 다양하고도 폭넓은 체험들이 그의 작품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성복님의 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의식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의 작품들에서 저음처럼 깔려 있는 깊은 고독을 감지하였다. 뜻밖이었다. 작가는 육척의 장신에다가 준수한 외모를 지녔다. 그와 잠시라도 交遊해본 사람들은 남을 위한 그의 세심한 배려와 젠틀맨다운 풍모에 한결같이 흠모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서 왜 고독의 느낌이 배어나는 것일까. 혹시 노년에서 오는 낭만성 고독이 아닐까.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애달픈 그리움의 독백이다.
고독을 동반하지 않는 사색은 없다. 사색은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일상에 묻혀 잊어버린 삶과 이웃과의 관계를 좀더 새로운 깊이로, 그리고 더 높게 끌어올릴 수 있는 성찰(省察)의 기회가 될 것이다. 고독한 사색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기 수양이기도 하다.
두류공원에는 낙엽이 지고 있다. 이 낙엽을 밟으면서 고독한 사색에 잠기기 참으로 좋은 계절이다. 토요일이면 가끔 혼자서 걸어가는 팔공산 낙엽의 길은 더더욱 좋다. -「고독」에서
이처럼 그는 고독에 침잠하면서도 고독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는 속된 것과 타협하지 않는 정의로운 가치관을 가졌고, 正道를 벗어난 어떠한 대상과도 쉽게 혼용할 수 없는 선비적인 사색을 가졌다. 따라서 정도로만 걸어온 그의 삶이란 애초부터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그의 고독은 '혼자 걷기'로 나타난다. 일정한 보폭, 일정한 시간으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그의 걷기는 삶의 궤적과도 일치한다.
젊은 시절 군에서 사관후보생의 교육을 받을 때 직각보행(直角步行)이 생도의 보행규칙이었다. 걸을 때 직선으로 걷고 방향을 바꿀 때는 직각으로 방향을 바꾸어 걸어가야만 했다. 직각보행의 필수 조건은 첫째, 가슴을 펴고 걸어야한다. 둘째, 눈은 정면으로 똑바로 보고 걸어야 한다. 셋째, 곧고 바른 마음 자세로 걸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걷기의 조건은 장교로서 군인 정신을 심어주는 하나의 수행(修行)의 방법이었다. 비록 지금은 걷기 편한 데로, 때로는 구불구불 걷기도 하지만 직각보행으로 다듬어진 '길 바르게 걷기'의 마음은 오늘까지 길을 걷는 나의 자세이기도 하다. 걸어 갈 때 가슴을 펴서 앞을 바르게 보고, 언제나 곧은 마음 자세로만 걷고 싶은 것이다. -「걷기」에서
인생의 산책과도 같은 작가의 걷기는 단 하루라도 멈추는 법이 없다. 사무실 근처 두류공원에서의 오후 산책은 하루 중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고,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토요일 나들이는 수십 년 동안 계속 이어온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걷기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일상적인 산보가 아니라 삶의 다양한 경험들을 관조해 보는 걷기이다.
그가 그렇게 걸으면서 사색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아름다운 고독을 씹어보기도 할 것이고, 그런 고독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희미했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또한 아쉬워지는 자신의 세월을 길게 늘이는 꿈을 꾸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색들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그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다.
절로 올라가는 길에 접어들면 길 양쪽에는 전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그리고 참나무과에 속하는 키 큰 활엽수 나무들이 우거져있다. 절 구경을 가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길가 나무들에게 어느 아름다운 손길이 이름표를 붙여 놓았다. 한 7∼8m 간격으로 수종에 따라 매달아 놓은 이름표를 보고 나는 나무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았다. 누가 나무에게 정다운 이름을 불러주랴. 스님이 가다가 불러줄 것인가. 아니면 가지에 앉는 새들이 불러줄 것인가.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합장하면서 불러보았다. 나는 오늘 제 이름도 모르는 나무들 앞에서 부처님께 염불 올리듯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래서 여기 서 있는 '층층나무', '잣나무'도 비로소 제 이름을 깨우친 것이 아닐까?" -「해인사 나무들」에서 그렇다면 그가 이렇듯 사색하며 걸어서 닿고자하는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는 진작에 스스로 '靑山'이라는 호를 붙이고 남들로부터 그렇게 부름 받기를 좋아했다. '청산'의 내밀한 상징성이야말로 그가 밝혔듯이 고독한 영혼이 애달픈 심정으로 갈구해온 피난처요 안식처가 아니었던가
이제는 정말 청산에 가고 싶고, 청산이 되고 싶기도 하다. 언제나 너울너울 푸르른 산이고 싶고, 우거진 산 계곡에서 맑은 물이 흐르고, 솔바람 소리 들리는 그런 산이고 싶다. 내가 태어난 곳도 시골이라 청산이 있어 사철 푸르고 마을 앞에는 맑은 물이 흘러 어린 시절은 청산과 더불어 살고 청산에서 뛰놀면서 살았다. 어릴 때 청산 아래에서 살다가 도시에 나온 후에는 가끔 작곡가 김연준 씨의 가곡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리라
-「청산에 살고 싶다」에서
이쯤해서 필자는 그의 작품집에 배어있는 고독의 그림자와 하염없이 진행되어온 '혼자 걷기'. 그리고 그가 지향하는 청산행의 인과적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3.
그의 출발지이자 그리움의 종착지인 추령. 그 추령 너머에 수필가 김성복님의 청산은 존재하고 있다. 혼탁한 사회에서 변함 없이 곧은 길만을 고집해 온 그는 어쩌면 남보다 더 고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을성 있게 걸어오면서 찾아본 정신적 안식처는 결국 유년의 푸른 꿈이 자라던 추령 너머 감포 앞바다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청산, 고희에 이르도록 평생의 세월을 푸른 산으로 자처하며 살아온 작가야말로 청산의 큰바위 얼굴이다. 그러니 그의 작품에 저음처럼 깔려있는 고독의 향기야말로 어찌 청산행을 꿈꾸어온 회귀본능의 애틋한 몸짓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