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수필강좌 - 수필의 모든 것 4
16. 수필 착상하기
우리는 참신하고도 창의적인 수필을 쓰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어떤 주제를 찾아야 참신한 수필이 될까?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폭넓은 인생 경험과 독서를 통해 다양한 체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상상력과 연상력, 직감력, 추리력, 창조력, 유머 감각과 위트가 수필에서는 필요하다. 이런 참신한 주제 찾기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의 착상은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만한 효과적인 방법이랄 수 있다.
(1) 가설에 의한 착상
가령, 석굴암을 들러 볼 때 동해를 바라다보고 있는 대불(大佛)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 볼 수도 있다. 왜 대불의 체형(體刑)이 정신형의 가냘픈 심성질(心性質)이 아니고 비만형의 영양질(營養質)일까? 천민 계급이었던 석공이 가령 못 먹어서 빼빼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평소에 자기 체형이 비만형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을 수 있다면 그 욕구 충족의 투영 현상이 그 조각에 형상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가설을 세워 상상과 추리를 해 나가다 보면 거기에 걸맞은 참신한 주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유사(類似) 착상
이른바 유추(Analogy)에 의한 착상법인데, 자연계를 잘 살펴보면 그럴 듯한 풍부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가령, 공작과 노고지리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어떤 특성을 유추해 낼 수도 있다. 공작에 비해 노고지리의 깃털은 볼품 없지만 하늘을 자유로이 날면서 멋진 노래를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사람도 신이 부여한 각자 나름의 능력과 한계와 그 장점이 한 가지씩 있다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겠다.
(3) 대비(對比) 착상
아시아에서는 톱을 당기면서 자르는데 미국에서는 톱니가 반대 방향으로 되어 있어 밀어 내면서 자른다는 사실과, 스푼 사용에 있어서도 미국에서는 밀어 내면서 떠올리는데 우리는 앞으로 당기면서 떠먹는다는 사실을 통해, 어떤 이치나 사고 방식의 차이점을 도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4)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해의문을 품어 보는 착상
가령 예수의 제자가 12명인가라는 데에 의문을 가져 볼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는 유태 민족의 12지파의 대표로 한정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정(正)과 부(副) 대표를 두었다면 24명이 될 수가 있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왜 여자는 한 사람도 없는가? 라는 의문을 품어 본다면 그런 착상에서 한 편의 흥미로운 수필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5) 역(逆)사고의 착상
기존의 개념이나 가치를 정반대로 생각해 보는 착상법이다. 수필의 묘미가 역설에도 있는 만큼 이런 착상법의 훈련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자가용의 편리성 때문에 요즘 자가용 홍수 시대가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고로 자가용의 불편성이나 위험성에다 초점을 맞추다 보면〈무자가용 상팔자〉하는 수필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6) 상식을 뒤엎어서 생각해 보는 착상
이는 역사고의 착상과 비슷하다고 하겠는데, 상식선에서 노사 사물이나 어떤 현상을 바라다보면 신선한 착상은 절대로 떠오르지 않는 법이니만큼 상식을 뒤엎어서 다시 생각해 보는 노력도 열심히 해 보아야 한다.
(7) 고정 관념에서 탈피해 보는 착상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낼 수가 없다. 가령, 가을"에 관한 고정 관념에 매달려 있다 보면 "슬픈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 "결실의 계절", "독서의 계절" 줄 어느 하나를 택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쁨과 희망의 계절"에다 초점을 맞추면 그런대로나마 참신한 착상이라는 평을 들을 수가 있다.
(8) 시점(관점)을 바꾸어 보는 착상
어떤 소재를 택하여 합당한 주제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관점을 바꾸어 다각적이고 다양한 관찰이 필요하다. 이런 착상법은 한 우물을 계속 파고 들어가는 "수직적 사고" 가 아니라 여러개의 우물을 동시에 파 보는 것이 물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라는 이른바 "수평적 사고"와도 통한다고 하겠다.
(9) 온고지신(溫故知新) 착상
낡은 사고법은 이것저것 서로 다른 전통 사고나 사상 그리고 낡았다 싶은 민족이나 풍속에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가령, "분만시 총각의 붉은 머리 댕기를 복부에 얹어 놓으면 순산한다"는 것을 속신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심리적 무통 분만설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는 해석이 그 예일 수도 있다.
(10) 하이브리드(Hybrid)에 의한 착상
이런 사고법은 이것저것 서로 다른 이질(異質)의 것들을 서로 결합시켜 보는 사고법을 말한다.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다 전혀 관계가 없거나 혹은 인연이 먼 서로 다른 것들을 끌어들여 둘러맞추다 보면 새로운 착상이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퓨전(Fusion)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끝으로, 이런 참신한 주제의 착상은 가치성이나 시대적인 필요성, 보편 타당성, 독창성, 개성미가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상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까지 열어 보이는 행위이다. 이때 사물은 경이로움과 눈부심으로 자신들의 모습과 의미를 우리 앞에 드러내 놓게 된다.
17. 수필의 문체
수필의 문체는 문장 진술 방식과 표현 기교에 따라 형성된다. 일반적으로 문장 진술 방식에는 설명, 묘사, 서사, 논증 등이 있는데, 이 방식은 수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설명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알기 쉽게 풀이하여 이해시키는 진술 방식이다.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에 사물의 현상이나 본질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하다.
묘사는 사물의 모습이나 상황을 보여 주듯이 그려 내는 진술 방식이다. 어떤 대상에서 받은 인상이나 감각적 체험을 그대로 그리기 때문에 주로 서정적 수필에서 많이 사용한다. 설명이 독자의 이해력에 호소하는 데 대해, 묘사는 감각에 호소한다는 점이 다르다.
서사는 일정한 이야기(story)를 시간이나 공간의 순서에 따라 진술하는 방식이다. 사건의 직접적인 인상과 목격자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에 서사적 수필에서 많이 사용한다. 묘사가 고정된 대상의 모습을 제시하는 데 대해, 서사는 움직이는 대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시한다는 점이 다르다.
논증은 아직 명백하지 않은 사실이나 원리에 대하여 그 진실 여부를 밝히는 진술 방식이다. 논리성과 분석력을 바탕으로 독자의 생각, 태도, 감정 등을 필자의 주장, 의견, 판단에 따르게 하고자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경수필보다는 중수필에 사용된다. 설명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데 대해, 논증은 설득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문학 갈래에서도 그렇듯이, 하나의 작품이 설명, 묘사, 서사, 논증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진술 방식만으로 이루어진 수필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이들을 작품 전체의 구조에 맞추어 적절히 섞어서 구사함으로써 주제를 구현하는 것이 수필의 일반적 진술 방식이다.
18. 수필의 내용과 주제
수필은 다양한 제재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다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신변잡기를 끝난다면,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학 작품에는 읽는 사람에게 감동과 감명을 주는 의미 있고 깊이 있는 주제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문학 작품에는 주제가 있다. 수필은 다른 갈래보다도 주제가 더 중요하다. 서사나 극갈래는 꾸며 낸 것들이고, 흥미진진한 사건이 있어 거기에서 읽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필이 속한 교술 갈래는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런 흥미진진함은 자연 덜할 수밖에 없다. 수필은 이런 약점을 깊이 있는 주제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수필이 관조(觀照)의 문학, 사색의 문학, 예지의 문학이어야 하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수필의 내용을 이루는 요소에는 제재와 주제가 있는데, 주제는 제재를 통하여 형상화된다. 주제는 제재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요, 가치 평가이며, 의미 부여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의 제재는 매우 다양하고 무한하다. 인간이 체험하고 사고할 수 잇는 모든 것이 수필의 제재가 될 수 있다. 곧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수필의 제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사회 현상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자연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수필의 내용적 특징은 바로 이 제재의 다양성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수필의 제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제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수필의 내용은 이러한 인생, 사회, 자연 등에 대한 지은이의 체험과 사색의 결과가 중심을 이룬다. 개인 문제를 다루는 수필은 지은이의 생각이나 느낌이 내용을 형성한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수필은 사회 현상이나 사회 구조상의 불합리성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적인 견해가 담길 수 있다. 자연을 제재로 한 수필은 자연의 본질이나 질서에 대한 지은이의 사색 결과가 내용의 중심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수필은 제재가 다양하게 때문에 주제도 다양한 양상을 띤다. 체험을 통하여 터득한 인생에 대한 예지는 인생관이 주제가 되기도 하고, 인간 사회나 자연에서 느낀 주관적인 정서가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여행에서 느낀 객수(客愁)나 답사에서 얻은 지식이 주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수필의 주제는 삶을 통하여 느낀 사소한 감상에서부터 인간의 삶과 죽음이 주는 철리(哲理)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영역에 걸쳐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 주제의 본령(本領)은 역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에 있다. 신변잡기적 수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담고 있는 중후(重厚)한 수필이야말로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삶의 향기와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독자가 '아! 인생이란 참으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칠 수 있게 하는 데 수필의 진정한 묘미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예지가 필요하다. 이것들을 통해서 수필은 인생의 깊은 의미와 가치를 천착(穿鑿)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고 천착하는 일은 문학의 멋과 운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가운데 망각한 수필의 철학적 가치를 되찾는 작업이며, 수필이 가지는 차원 높은 특질을 발휘하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깊이 있는 철학적 사색을 바탕으로 한 수필들이야말로 인간의 고양된 정신적 지표와 교양적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켜 준다.
19. 수필의 정체성 찾기
홍억선(수필가)
1.
수필가 허창옥과 필자와의 만남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삼 년 남짓 되었을까. 그 동안 드문드문 교류가 있었고 그의 필명이 제법 친근해질 무렵 두 권의 작품집을 받았다. 한 권은 작품집 『길』이요, 또 한 권은 연전에 상재한 작품집『말로 다 할 수 있다면』이다.
"허창옥은 수필을 잘 쓴다." 이것이 두 권의 작품집을 내리 읽고 난 후의 느낌이다. 이 직설적인 표현 뒤에 덧보태어지는 말들은 아마도 구질구질한 사족이 될 것이다. 필자의 이런 태도를 두고 요즘 말로 코드가 맞아서 탄성을 내뱉는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겠느냐는 지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필집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에서도 한번 잡은 눈길을 도무지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작가는 사실 드물다.
2.
허창옥의 수필은 수필답다. '수필답다'라는 말은 수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타 수필가들은 수필의 본령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다만 허창옥의 수필에서 나타나는 형식과 내용의 한 특성을 붙들고 수필의 정체성에 다가가 보고 싶다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수필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는 수필의 형식을 잘못 이해하는데 큰 원인이 있다. 문학의 각 장르들이 스스로의 형식을 표방함에 있어서 시는 율격을, 소설은 플롯을, 희곡은 삼일치를 강조하는데 비해 수필이 '무형식의 형식'을 들고 나오는데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다양성이라는 미명 아래 일기문, 기행문, 서간문, 수상록, 자서전, 비평문, 사설, 서문 등 무수한 산문들을 용인 내지 묵인하는 바람에 그로 인해 야기된 장르 개념의 퇴색은 수필계가 자초한 일이다. 결국 수필은 형식을 얼버무림으로써 서정 일변도의 내용만 강변하는 애매한 잡문으로 비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수필의 형식을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테면 수필이 소설의 형식적 요소를 공유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소설이 주제, 구성, 문체를 취하고 인물, 사건, 배경을 구성요소로 삼는다면 같은 산문문학으로서 수필도 당당히 그 형식적 요소들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소설은 자아와 세계와의 대결을, 수필은 자아를 세계화한다는 속성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수필이 갖는 다양한 형식은 그 영역 아래 잡다한 갈래를 포함한다는 의미로 쓰여질 것이 아니라 인접 장르인 시나 소설, 희곡의 형식까지 차용할 수 있다는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허창옥은 이미 여러 작품에서 이를 구체화하고 있는 바 연작 '바다에서' 1, 2, 3, 5, 6과 '동재가 자라서', '독백' 등에는 시적 표현 형식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그렇다면 시적 표현 형식을 빌려 오는 것이 수필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인가.
수필은 교술 갈래로서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다. 어떤 일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비평하고 알려주고, 깨우치는 기능은 자칫 비문학적인 속성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이에 반해 시적 표현 형식은 문학적인 정서를 환기시키는 기능이 강해 이를 차용함으로써 수필의 기울기에 균형을 잡고 비문학성을 상쇄하면서 문학성 제고에 유효함을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색, 관조를 바탕으로 내면의 조응에 충실한 허창옥으로서는 시적 표현 형식이 더욱 요긴하였을 것이다.
허창옥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은 그가 어떻게 수필이라는 구조물을 축조해 나가는가를 확연히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이 어째서 단아하고 튼실한 구조를 가졌다는 소리를 듣는가. 3000자 내외의 짧은 글에서 어떻게 40화음의 최신형 휴대폰 소리를 낼 수 있는가. 이는 '참을 수 없는.....'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품에 적용된 극적, 입체적 구성법이 그 답이다
"사는 게 갈수록 무겁네."/ 얼마 전, 집안 행사에서 만난 한 친척이 내게 한 말이다.
"그렇지, 정말 그런 것 같아."/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별일 없었어?"/ 나의 인사에 그가 사는 게 갈수록 무겁네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중략)
그에게서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 그 하나는 십여 년 전에 마흔 살도 못 채우고 삶을 놓아 버린 오빠의 얼굴이다. (중략) 또 하나는 어이없게도 내 얼굴이다. 오빠 생각이 난 건 그러려니 하지만, 나는 왜? 그의 말 때문인 성싶다.
"사는 게 갈수록 무겁네."
그의 입으로 내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은 거의 전율에 가까웠다. 우리는 서로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큼 살고 나서 마주보니 그의 얼굴이 내 얼굴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동류의식이다.(중략)
최근에 그가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전에 앓았던 늑막염이 재발하였고 간이 나빠졌다고 한다. 그의 남은 삶이 참으로 무거울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중략)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서
작품의 말미에 수필적 장치를 마련해 놓지 않았다면 사소설의 영역에서 결코 벗어나기 어려운 작품이다.
현대 수필의 초기단계에서 '백두산 근참기'라든가, '심춘순례', '서유견문'과 같은 기행문과 일기문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필자는 특별히 기행문이나 일기문에 배타적인 감정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으나 글의 전개방식에는 딴죽을 걸고 싶어진다. 기행이나 일기는 대체로 시간 순서나 공간 이동에 따라 제재들이 전개되는 자연적 구성을 취한다. 물론 개개의 글이 가지는 글의 성격을 배제한 채 전개 방식의 우열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의 나열이라고 그토록 지탄받는 작금의 수필이 굳이 이 무미건조한 자연적 구성에 애착을 가질 까닭이 어디 있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사는 게 갈수록 무겁네.'라는 서두의 문장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인과율 때문이다. 인과율이란 어떤 이야기를 빌미로 다음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전개 방식이다. 결국 이 서두의 문장은 작품 속에서 '오빠'를 지배하고, 이어서 '나',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 지배한다. 이처럼 여러 이야기를 하나의 지배 구조로 긴밀히 통합하는 구성이 극적 구성, 입체적 구성이다. 수필이 가지는 진실성과 논리성, 통일성, 구조의 형식미는 이러한 구성법에 의해 보다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허창옥은 이러한 구성법에다 수미상관의 장치까지 보태어 작품의 형식을 더욱 튼튼히 고정시키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그의 이러한 작업은 저간에서 말하는 실험성하고는 다른 차원이다. 수필의 형식적 다양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빈약했던 수필의 형식적인 정체성을 되찾아오는 작업임이 틀림없다.
3.
허창옥의 수필은 견고한 형식에 힘입어 매우 초점화된 사고행위를 반영하고 있다. 초점화된 사고 행위는 대단히 집약적이다. 마치 카메라 렌즈의 조리개를 한껏 줄여서 대상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다. 장면(scene)의 변화가 거의 없기에 시선은 고정되거나 느린 이동을 이룬다. 당연히 횡적인 흔들림도 크지 않다. 끊임없이 종적으로, 내적으로, 구심력을 가지고 자의식을 깊이 파고드는 특징이 있다. 허창옥의 작품을 사색적, 관조적, 철학적 수필로 분류하는 것은 바로 이 초점화된 사고 행위와 관련이 있다. 그의 이러한 내면세계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지금 생각하니 나는 자의식 과잉의 꼬마였던 것 같다. 사랑 받지 못한다는 소외감과 감꽃 목걸이를 못 만들게 된 상실감 때문에 다른 것들을 거부해서 더 많은, 더 중요한 것들을 잃게 되었으니 말이다.
감꽃이 저버렸던 내 세계는 모든 것이 정체된 하나의 공간이었다. 이따금 지나가던 바람이 내 닫힌 세계의 문고리를 흔들곤 하였다. 그것은 호기심이나 외로운 감정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자극이 들쑤실 때에는 나는 문고리를 애써 잡고 안으로만 움츠렸다. 그렇듯이 바깥바람에 섞이질 못하고 빗장 안에 고인 바람은 내 의식 속에서 아프게 휘감길 뿐이었다.
내 유년의 작은 손은 늘 비어 있었다.
-「다시 감꽃을 꿰며」에서
어쩌면 작가의 아픔일 수도 있는 유년의 편린을 가지고 그의 자의식을 재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작품 군데군데에서 연이어 배어 나오는 의식의 배경을 두고 추론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초점화된 사고 행위가 수필의 본령인 삶의 실체를 형상화하고 현상과 존재의 본질을 더욱 깊이 탐색하게 하는 묘약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허창옥의 수필이 초점화된 사고행위를 가지게 된 또 다른 요인은 그가 취하는 소재에 있다.
나는 늘 무엇인가가 그립다. 아득한 유년의 뜰이 그립고, 그 마당의 우물가에서 두레박질을 하던 젊은 어머니가 그립다. 이제는 멀어져 간 순진무구했던 날들이 그립고, 사라져 가는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립다.
나는 온갖 것들을 다 사랑한다. 물 무늬 잔잔한 못물과 그 못가에 서있는 나무를 사랑하고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바다를 사랑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이따금 몹시 아프다. 인간의 근원적인 고뇌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고야마는 슬픔 때문에 가슴 저미는 날이 적지 않다. 그런 정감들을 풀어내기 위해서 수필을 쓴다. 그러고 나면 내 영혼에 환하게 햇살이 든다.
-「햇살 가득한 방에서」에서
허창옥의 삶은 곧 수필이 되고 그의 수필은 곧 그의 삶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수필 쓰기란 그리움, 사랑, 슬픔 같은 일상의 앙금을 사색이라는 그물로 건져 올리는 작업이다.
하긴 수필가가 일상을 벗어나서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수필의 소재가 되는 개개의 일상들을 조금만 넓게 보면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어 누구에게나 낯익은 '별게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곧 바로 수필의 문학성과 잇닿아 있다. '쉽게 그리고 깊게, 그것이 수필의 딜레마이며 미학이요, 내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작가가 밝혔듯이 이 친숙한 일상은 문학성을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깊어져야 한다'라는 명제와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해 친숙한 일상이 문학적 해석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쳐 어떤 농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문학성의 등급이 매겨진다고 할 수 있다. 그 농도를 짙게 하는 묘약이 바로 초점화된 사고 행위이다.
삶이란 인간 존재의 문제이고 존재의 문제를 세밀히 추적하는 것이 존재의 본질 추구이다. 존재의 본질 추구에는 사색이 필요하고 사색은 다시 관조를, 관조는 다시 철학을 요구한다. 허창옥의 수필이 사색적, 관조적, 철학적이라 함은 초점화된 사고 행위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지만 그 사고행위가 끊임없이 종적으로, 내적으로, 구심력을 가지고 깊이 들어가면 어디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 논의는 여지로 남겨 두자. 필자는「바다에서 7」,「사(死」를 비롯하여 몇몇 작품에서 멜랑콜리(melancholy)의 무늬를 언뜻 감지했다.
결국, 허창옥이 사색과 관조라는 촉수로 필자를 감전시켜 단숨에 그의 내면세계로 끌어들인 힘 뒤에는 초점화된 사고행위가 또 다른 수필의 정체성으로 버티고 있었다.
4.
필자는 긴 사족을 덧붙이면서 허창옥의 작품 세계가 지니는 핵심적인 특질에서 비껴난 논의들만 하였음을 시인한다. 하지만 허창옥의 작품에서 풀어낸 형식과 내용의 한 끄나풀을 통해 그가 수필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는 작가임을 알았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들이 계속하여 수필의 정체성을 판독하는 중요한 준거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20. 새로움과 감동이 넘치는 수필을 위하여
홍 억 선
1.
'散文의 시대'다. 수필가로서 팔을 안으로 굽혀 强辯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무한 우주관이 힘을 얻으면서 산문의 시대는 이미 예견되었다. 거대한 역사의 바퀴가 원심력을 가지고 단방향으로 질주하면서 산문의 시대를 열어 놓은 것이다.
작금의 수필은 이 기름진 토양 위에서 종횡으로 팽창을 거듭하면서 그야말로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문학 속에서 수필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선배 수필가들의 盡力에 힘입어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해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음은 여전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집요하게 수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일까? 다수의 비수필인들은 이 시간에도 케케묵은 '문학성'의 논리로 수필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수필의 대응은 답답할 정도로 미약하고 궁색한 것처럼 보인다. 혹시 수필이 애초에 문학의 변경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태생적 속성을 지닌 것은 아닐까. 아니면, 수필이 정체성의 조정을 앞두고 기존의 틀을 고수하려는 강박 관념에서 진퇴양난을 맞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2.
수필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3분법과 4분법을 원용해봄직하다.
수필을 3분법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문학성의 시비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이의 적용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3분법이 '작가의 상상적인 재창조'만 문학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에 허구성이 도입되어야만 수용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만약 수필계가 리얼리티의 구속력에서 벗어나 "상상적인 재창조"를 허용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수필문학은 형식적인 다양성에 걸맞게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운 창작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또한 대중적인 흥미를 곁들일 수 있어 읽히는 수필로서의 접근이 용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르의 나눔에는 공유성 만큼이나 차별성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수필은 시와 소설, 희곡으로 대표되는 3분법의 어느 자리에도 쉽게 놓여질 수 없으며 거기에다 이들과의 차별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수필은 4분법에 따라 지금의 교술갈래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다. 수필이 기법상 허구성의 유혹이 있어도 본질은 어디까지나 비허구성(non-fiction)에 있음은 확실하다. 교술갈래를 외적 개입이 있는 자아의 세계로 설명하고 있는데는 체험 즉 리얼리티에 그만큼 초점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이 체험이라는 것을 앞에 두고 보면 참으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수필의 제재가 되는 체험 즉 일상이라는 것이 별반 새롭지 않게 다중에게 다가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인생이 유별난 것 같아도 조금만 넓게 보면 그게 그것이다. 체험을 고집할수록 제재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고 장르는 노쇠화로 기울어지기 쉽다. 물론 수필이 존재의 본질이나 현상의 깊이를 다루는데 강한 면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반박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또한 감상성과 관념성, 보수성에 빠질 우려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수필이 세련을 앞세워 좁고 깊게만 들어간다면 결국 철학이나 종교와 같은 비문학적 영역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결국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오늘날의 수필이 서정수필의 문학적 형상화에 더욱 천착하고 있음을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교술갈래라는 울타리에는 수필 뿐만 아니라 일기문, 기행문, 서간문, 수상록, 자서전, 전기문, 칼럼 등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갖가지 비문학적 산문들이 포진하고 있어 수필의 비문학성 논의에 빌미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논의가 진행될수록 허구성이 마치 미래 수필을 추동하는 핵심인양 부각되어 버렸다. 그러나 결코 그럴 의도는 없다. 다만, 문학이 언어 예술인 이상 머리에서, 눈에서, 입에서, 손에서 떨어져 나온 체험이 허구를 전혀 배제한 채 문학적인 형상화를 이룰 수 없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구나 모든 문화의 장르들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해체와 짝짓기를 거듭하는 퓨전시대에 수필만이 그것도 울타리 내에서 체험과 허구성으로 나뉘어져 서로를 대적할 이유는 없을 것이 아닌가.
3.
어쨌든 본 세미나에서는 '새로움과 감동이 넘치는 수필'을 부제로 붙였듯이 위에서 언급한 관점을 기저로 깔고 서로 異見을 가진 발표들이 진행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와 무관하게 이제까지 수필의 본령을 지켜온 서정 수필의 문학적 형상화에 초점을 맞춘 심도 있는 발표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수필이 가진 본질 안에서 각종 수필 작법도 소개될 것이다. 이를테면 수필가들의 큰 호응을 받고 있는 5매 수필, 퓨전수필, 기행 수필이 그 예이다. 이와 함께 연작수필, 중편수필도 염두에 둘 만하다.
한편으로는 이와 달리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각에서 수필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작업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른다면 더욱 자유롭고 새로운 제재와 시점·화자의 수필 세계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세미나를 흔히 패션쇼와 빗대어 보는 것은 取捨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본 세미나에서 새로운 논의가 있다면 유의해서 지켜볼 일이고, 낯익은 논의들이 있다면 쟁점화하여 바인딩(binding)하는 계기로 삼을 일이다. 발표 이후에도 더욱 가멸찬 논의가 진행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