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지금 여기에/책사랑

[스크랩] 수필강좌 - 수필의 모든 것 2

사랑빛 2014. 11. 18. 15:05

6. 깍두기 說

수필가 윤 오 영

C君은 가끔 글을 써 가지고 와서 보이기도 하고, 나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나도 그를 만나면 글 이야기도 하고 잡담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다.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깍두기를 좋아한다고, 한 그릇을 다 먹고 더 달래서 먹는다. 그래서 오늘저녁에는 깍두기를 화제로 이야기를 했다.

깍두기는 이조 정종(正宗)때 영명위(永明慰) 홍 현주(洪顯周)의 부인이 창안해 낸 음식이라고 한다. 궁중에 경사가 있어서 종친(宗親)의 회식이 있었는데, 각궁(各宮)에서 솜씨를 다투어 一品料理를 한 그릇씩 만들어 올리기로 했다. 이 때 永明慰 부인이 만들어 올린 것이 누구도 처음 구경하는 이 소박한 음식이다. 먹어 보니 얼근하고 싱싱한 맛이 일품이다. 그래서 위에서 「그 희한한 음식,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문하시자「이름이 없습니다. 평소에 우연히 무를 깍둑 깍둑 썰어서 버무려 봤더니, 맛이 그럴 듯하기에 이번에 정성껏 만들어 맛보시도록 올리는 것입니다」「그러면 깍둑이구나」하고 크게 찬양을 받고, 그 후 오첩 반상의 한 자리를 차지해서 상에 오르게 된 것이 그 由來라고 한다.

그 부인이야말로 아마 다른 부인들은 산진해미 희귀하고 값진 재료를 구하기에 애쓰고 주방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무·파·마늘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갖은 양념 갖은 고명을 쓰기에 애쓰고, 소금·고추가루는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료는 가까운 데 있고 허름한데 있었다. 옛날 음식 본을 뜨고 혹은 중국사관(中國使 )이나 왜관(倭 ) 음식을 곁들여 규격을 맞추고 법도 있는 음식을 만들기에 애썼으나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官中에 울릴 음식을 그런 막되기 썰은 규범에 없는 음식을 만들려 들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무를 썰면 곱게 채를 치거나 나박김치본으로 납작 납작 예쁘게 썰거나 장아찌본으로 걀쭉걀쭉하게 썰지, 그렇게 꺽둑 꺽둑 썰 수는 없다. 기름·깨소금·후추가루식으로 고추 가루도 적당히 치는 것이지 그렇게 시뻘겋게 막 버무리는 것을 보면 질색을 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깍두기는 무법이요 창의적인 대담한 파격이다. 그러나 한국 음식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면 이 대담한 새 음식은 탄생될 수 없다. 실상은 모든 솜씨가 융합돼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무법중의 유법이다. 무를 꺽둑 꺽둑 막 써는 것은 곰국 건지 썰던 솜씨요, 발효시켜서 익혀 먹도록 한 것은 김치 담그던 솜씨가 아니겠는가, 다 재래에 있어 온 요법이다.

요는 이것이 따로 따로 나지 않고 완전동화 되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싱싱하고 얼근한 맛이 구미를 돋구도록 염담을 잘 맞추어야 한다. 음식의 염담이란 맛의 생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인의 구미에 상하 귀천 없이 기호에 맞은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격식이 문제 아니요 유래가 문제 아니다.

이름이야 무엇이라 해도 좋다. 신선로(神仙爐)니 탕평채(蕩平菜)니 두견화다(杜鵑花茶)니 가증스럽게 귀한 이름이 필요 없다. 깍두기면 그만이다. 깍두기가 반상(정식) 오첩에 올라 魚·肉과 어깨를 나란히 하되 오히려 中央에 놓이게 된 것이요, 위로는 官中士大未家로부터 일반 빈사(貧士)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애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C君은 영리한 사람이다. 「先生님, 지금 깍두기를 빌어 隨筆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지요. 수필의 소재는 우리 생호라 주변에 있고 다시 평범한 데 있는 것이요 신기하고 어려운 데 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습니다.」「그러나, 무가 싱싱하고 단 무라야 깍두기 맛이 나지 썩은 무나 시든 무야 되겠나」「그것은 글의 품위에 관계되겠지요, 청신하고 진실한 것으로 깊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야 되겠지요」「이름이야, 小品이라고 하든 에세이라고 하든 잡문이라고 하든 상관할 바 아니지요, 나는 내 글을 쓰는 것이니까요. 어느 이름에 구애될 필요는 없지요. 어느 형식이나 유파에 따를 필요도 없지요. 오직 파격이 필요하지요. 램의 수필이. 어디까지나 환상的이요, 정서的인가 하면 노신(魯迅)의 수필은 정열적이지요. 혁명적이었고, 주자청(朱自淸)의 수필이 서정적이요 미문적이었다 하면 프루스트의 수필은 사색적이요 내심적이었거니와 그들의 수필을 기준으로 할 아무 필요도 없으니까요.

서구적인 저널리즘이 칼럼니스트들을 수필 문학가라 하고 한편에서는 서투른 작문을 수필 명작이라고 떠드는 것을 추종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남들이 내 글도 수필이라고 불러 준다면 그런대로 받아들여 족하고요. 다만 읽어서 싱싱하고 얼근한 깍두기 맛만 낸다면 소설·시와 같은 문학들과 함께 오첩 반상에, 오히려 중앙을 차지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던 중 무를 숭덩 숭덩 썬 것이 무법인 듯하되 곰국 건지 썰던 법이요 云云하시던 말씀인데 수필에서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자네가 내 말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니까 좀 무서우이마는 수필에 정서가 흐르는 것은 서정시에서 빌어온 법이요 수필에서 서술이 긴박하고 빈틈 없이 나가는 것은 단편 소설에서 빌어온 법일세. 설리는 평론의 수법에서, 묘사는 배경 소설의 수법에서, 문장의 탁의는 시의 메타포에서 확충된 것이요, 문맥의 정연함은 논설문의 수법에서, 독자에게 친절감을 잃지 않는 것은 서명한 서간문의 수법에서, 사색적이요 반성적인 것은 저명한 일기문의 수법에서, 문장의 활기있는 긴장(緊張)은 희곡(戱曲)의 수법에서, 문단과 문단이 갈릴 때마다 청신(淸新)한 전환(轉換)은 시나리오의 씬을 바꾸는 솜씨에서 자유자재로 섭취 활용해 가며 자기의 독특한 문체와 참신한 문태(文態)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거나 의식적인 기교에 지나치거나 익지 아니한 날내가 나면 그 글은 원숙한 글이 아닐 것일세」

「음식의 맛의 생명은 염담 맞추기에 있다고 하셨는데 문장에서 염담이란 무엇에 해당됩니까?」

「문장의 농담(濃淡)이지. 문장의 농담(濃淡)이 없으면 정물화(靜物畵)에 음영(陰影)없는 것과 같고, 음악에 박자 없는 것과 같지. 문장은 이 농담에 의해서 含蓄도 있고 餘韻도 있고 奇幻도 있고 내재적인 리듬도 있어 비로소 시취(詩趣)를 갖게 되는 것일세. 고인이 농담(濃淡)없는 문장을 가리켜 몰골도(沒骨圖)라고 풍자한 이가 있어. 우리 모양으로 문장이 미숙하고, 또 배워 보려는 사람들은 이 깍두기에서 얻는 바가 있을 것일세.」

日後의 참고 삼아 이 날의 문답을 적어 둔다.

7. 제목 붙이기

세상 만물에는 이름이 있다. 사람의 이름을 비롯하여, 짐승의 이름, 가게의 상호(商號), 대회 명, 직장명, 지역명,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제목에 해당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전부터 이름이 일의 성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주역에 능통한 이를 찾아가 음양오행을 따져서 이름을 짓는 등 작명에 정성을 다하여 왔다.

문학 작품이나 작품집의 제목도 그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문학작품 뿐만 아니라 신문기사도, TV 프로그램 그 타이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이렇게 중요한 제목이기에 제목 붙이기는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아무리 산뜻하고 멋있는 제목이라도 내용과 사리에 맞아야 한다. 미사여구만을 붙여서는 독자는 곧 실망하게 되고, 지나치가 거창하거나 지나치게 구체적이거나 딱딱하게 붙여도 실패하게 된다.

수필에 있어서의 제목이란 사람의 얼굴과도 같은 것이다. 얼굴만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제목만 보고도 곧잘 그 글에 이끌려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작가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하고 고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첫눈에 반했다 해도 교제를 하면서 실망 할 수 있듯이 아무리 호기심을 자극한 멋진 제목이라 하더라도 그 글의 내용이 뒷받침 되지 않을 때는 독자는 곧 실망하게 된다.

무슨 유형의 수필이든 제목을 붙일 때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제목만 봐도 문장의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반점만 봐도 얼룩말인 줄 짐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글을 쓰는 목적이 적절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가지고 제목을 만들어 보자.

▶여행은 자유로의 탈옥 (재미에 목적)

▶1박 2일로 다녀온 비경 (정보전달에 목적)

▶여행은 낭비요 사치인가 (설득에 목적)

▶나는 내 생의 종착지를 점찍어 두었다 (감동에 목적)

▶우선 떠나라, 자유의 혼을 찾아 (행동화의 목적)

셋째,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이는 제목뿐 아니라 내용에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남의 제목이나 비슷한 것을 모방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제목 자체도 개성적이고 창작적이어야 한다.

넷째, 논문이나 학술적인 것, 실용적인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문학은 상식적이어야 하고 미적(美的)이고 쾌락적이고 상징적이어야 하므로 지나치게 전문적인 용어, 평범한 실용어는 그 자체가 적합하지 않고 매력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 쉽고 구체적인 것이 좋다.

지나치게 쉬운 것만 찾아도 안되고 너무 구체적이어도 안되지만 이해하기 어려거나 무겁거나 광대하거나 생경한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특히 작품의 분량에 맞는 제목이어야 한다. 10매, 15매짜리 글에다 거창한 철학적 명제를 붙여도 안 되고 1권의 수필집에다 가냘픈 제목을 붙여서는 안된다.

책이나 작품의 제목도 유행이나 시류(時流)를 타는 것 같다. 한때 수필집의 제목이 긴 문장으로 된 것이 유행하더니 요즘은 짧아지고 있다. 지나치게 서정적인 긴 제목은 설익은 감정의 표출을 강요할 수 가 있고, 읽지 않아도 그 내용을 대부분 짐작하게 만든다.

수필의 제목은 간결하면서도 암시적이고, 서정적이며 참신한 의미의 용어를 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8. 문학은 언어 예술이다

문학이란, 언어라는 표현 매체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에, 문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언어 예술이란 점이다. 음악이 음을 통해서, 미술이 선을 통해서 표현되는 예술인 것처럼 문학의 가장 우선적인 특성은 언어 예술이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란 물론 문자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반드시 문자 언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득한 원시 시대에 인류가 문자를 쓰기 이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구비 문학이 있었다.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오천 년을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헤아려 보면, 오히려 문자 언어로 기록된 문자의 역사보다는 음성 언어로 전승된 문학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문자 언어의 보급이 대중화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문자 언어로 기록된 문학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문학에 사용되는 언어는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을까? 일반적으로 문학의 언어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별로 다르지 않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문학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일상적인 언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받아들여 의사 소통을 하는 도구이다. 반면에, 문학 언어는 의사 소통의 기능을 가지면서, 어떤 이미자와 느낌까지도 전달하는 함축성이 있다. 또 문학의 갈래에 따라 독특한 방식으로 언어가 구사되기도 한다. 즉, 시나 소설, 수필, 희곡 등 문학의 갈래에 따라 그 쓰임이 달라진다. 같은 언어라 하더라도 시에서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지만, 소설에서는 분위기 형성이나 사물의 느낌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쓰인다. 소설에서는 인물이나 배경의 상세한 묘사가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반면, 희곡에서는 오히려 상세한 묘사는 피한다. 이처럼 문학의 갈래에 따라 언어의 사용법이 달라진다.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일상 언어는 분명한 의미와 논리성을 중시한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언어의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꽃에 대한 시를 쓸 경우, 그 꽃의 이름이 무엇이고, 잎은 어떻게 생겼으며, 언제 열매를 맺는가 하는 사실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꽃이 환기하는 분위기나, 시인이 꽃을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그 꽃에 대해 시인이 부여하는 의미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 사용되는 언어는 정서적이고 함축적인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9. 문학은 개연성(蓋然性)을 바탕으로 하여

재창조된 세계이다

문학은 '개연성(蓋然性)있는 허구(虛構)'를 통해 새로운 가치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가치의 세계를 정서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개연성 있는 허구'란 곧 '그럴 듯하게 꾸민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학이란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인생이나 자연, 또는 역사나 현실 속에서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 즉 실제 생활에서 유추된 세계나 정서, 사상, 이상 등을 내용으로 하여 창조적으로 꾸며낸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배경이 우리가 아는 곳과 너무 닮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쓴 것 같아 놀라기도 한다. 또한 실제 인물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며, 소설의 주인공이 우리의 부모나 친구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런 예들을 보면, 소설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소설이 곧 현실은 아니다. 현실에서 소재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시각과 작품의 성격에 따라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다. 어떤 것은 빼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강조하여 두드러지게 하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간단히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이 소설은 현실을 소재로 하여 재창조된 세계이다.

문학의 허구적 속성은 소설이나 극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달밤의 어떤 마을 풍경을 시로 쓸 경우 마을의 모양과 길, 냇물, 정자, 나무 등과 같은 실제의 사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시인이 드러내려는 마을의 달밤 풍경에 대한 이미지와 그 의미에 맞는 상황을 설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도 허구의 한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문학은 어떤 사실적인 진리를 전달하거나 어떤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유추된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문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를 만들어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허구가 문자 그대로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면 독자는 문학에서 즐거움과 인생의 의의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구는 새로운 인생과 현실에 대한 창조 정신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며, 인생에서 참된 삶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문학에서의 진실성이다.

10. 문학은 사회적·역사적 산물(産物)이다

문학 작품은 어느 시대의 상황 속에 있는 시인, 작가에 의해 쓰여지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그 시대의 현실과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작가는 현실(現實)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고, 작품 역시 그러한 작가의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든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 다시 말해 현실을 바라보는 안목(眼目)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작가의 현실에 대한 안목을 통해 삶을 재구성하고, 의미있는 해석을 내려보고자 하는 행위인 셈이다.

문학 작품에 반영(反映)된 현실은 일상 현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고 작가에 의해 재구성(再構成)된 현실이다. 단순한 현실의 나열이든가, 현실에서의 가능성이 없는 가공(架空)만으로는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가 없다.

문학 작품에 반영된 사회적·역사적 현실들은 인생의 진실한 여러 단면들이다. 독자는 문학 작품 속에 용해된 현실과 독자가 살아가고 있는 실제의 현실을 대응시킴으로써 문학 작품 속의 삶과 자신의 삶을 대비하고, 비판적이고 정확한 안목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삶의 의미를 인식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이처럼 문학 작품을 통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의미 없이 겪었던 현실적 체험들이 하나의 지향성과 의미를 띠게 되며 새로운 안목이 창조되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삶을 새롭게 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 삶의 현실을 재창조하는 작업이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11. 문학의 가치

문학 작품은 우리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통찰과 이해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인간과 자연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우리 사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곧 삶의 중요한 항목들인 동시에, 문학의 공통 주제가 된다.

문학 작품을 통하여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되면 그런 문제들에 대한 이제까지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은 우리의 꿈은 무엇인가, 우리의 행복한 삶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생각들을 하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물음들은 현실적으로 쉽게 해결되지는 않지만,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렇듯 문학은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현실을 새롭게 보도록 촉구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그러한 물음들을 독자에게 제기하고, 독자는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의문을 통한 정신적 깨달음과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문학 작품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나 태도를 용인한다 하더라도, 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서 이미 쓰여진 하나의 완결된 구조물이기 때문에, 해석이나 감상에 있어서 무한정으로 다양화될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해서 그 다양한 해석이나 감상들이 타당한 것이 되려면, 작품 전체를 꿰뚫는 의미 체계로 읽어야 함은 물론,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야만 한다. 작품에 대한 부분적인 인상으로 작품 전체를 평가하거나, 작품이 행간에 감추고 있는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감각적인 측면이나 오락적인 측면만을 확대 해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12. 수필의 구성(1)

주제와 주제문이 확정되고 소재나 제재가 마련되었으면 구상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그러나 머릿속에 막연히 정리한 구상 내용을 그대로 글로 나타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대로 써 나가면 자칫 처음에 구상했던 일을 잊어버리거나 엉뚱한 이야기로 들어가 버려 글의 생명인 통일성과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므로 글쓰기에 앞서서 주제가 잘 드러나도록 소재나 제재를 짜임새 있게 배열하는 일, 즉 구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구상은 작문의 내용이 잘 드러나도록 글 전체의 균형을 잡아 내용에 유기적인 맥락이 설 수 있도록 하는준비 단계로서, 이 구상의 결과로 얻은 문장의 짜임새가 구성이다. 짧은 글은 머릿속에 그 내용을 얽어 둘 수 있지만 다소 긴 글은 미리 작문 내용의 얼개를 잡아 놓고서 계획적으로 글을 써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글의 대략적인 얼개를 잡는 구성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구성의 방법은, 쓰고자 하는 글의 내용과 특성에 따라 여러 방법이 있으나 대체로 소재를 배열하는 요령에 따라 전개적 구성과 논리적 구성으로 나눌 수 있다.

전개적 구성은 일기나 기행문, 수필 등 개인의 직접 체험을 소재로 하는 글에 많이 사용되고, 논리적 구성은 논증이나 설득의 성격을 띤 내용을 전달하는데 적절한 방법이다.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적 질서에 입각하여 작문 내용의 얼개를 생각하는 방법을 전개적 구성이라고 한다. 전개적 구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자연적인 질서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 구성' 이라고도 한다.

기행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대구를 출발해 거창, 남원, 정읍, 부안을 거쳐 오후 늦게 변산반도에 도착했다고 하자. 고사포, 격포, 채석강, 변산해수욕장, 내소사를 돌아보면서 동해와는 다른 서해의 정취에 흠뻑 젖게 될 것이다. 저녁이 되어 바다가 보이는 방갈로에 숙소를 정해 놓고 하루 일과를 정리하게 될 것이다. '아침→점심→저녁'의 시간 변화에 따라 여행 일정을 정리할 수도 있고, 채석강의 경치와 내소사의 운치에 관해 공간적 이동에 따라 정리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간이나 공간적 질서에 의해 글의 얼개를 생각하는 방법, 즉 시간적 구성과 공간적 구성이 전개적 구성이다.

자연적인 질서와 상관 없이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논증 또는 설득을 위주로 하는 글을 쓸 때 주로 활용하는 방법이 노리적 구성이다. 논리적 구성은 내용 조직에 있어 논리성을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계성·통일성·강조성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단계식·포괄식·점층식·열거식 구성 등이 있다.

수필의 구성(2)

수필이 다른 갈래에 비해 형식이 자유롭다고 하여 수필에는 구조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수필은 일정한 구조로 이루어지며, 수필의 모든 요소는 주제를 향해 집약되고 통일되고 질서 있게 배열된다..

수필의 구성은 제재의 유기적 배열이고 주제를 구현하기 위한 기법이며 예술성의 바탕이 되는 요소이다. 소설이나 극처럼 구성에 일정한 틀이 확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필이라고 해서 구성이 없을 수는 없다.

구성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잘 짜여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구성 방식에는 단순 구성, 복합 구성, 산만 구성, 긴축 구성 등이 있다.

단순 구성은 한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지는 구성 방식이다. 여러 가지 사실이나 사건이 복잡하게 얽히지 않기 때문에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약점도 있다.

복합 구성은 두 가지 이상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서 진행되는 구성 방식이다. 이 방식은 일반적으로 구조적 예술미를 구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탄탄하게 짜여지지 못하면 주제를 선명하게 제시하기 어려운 약점도 있다. 이 방식은 주된 주제에 부수적인 주제가 복합되는 경우와 대등한 몇 개의 이야기가 나열되는 경우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산만 구성은 일정한 계획 없이 붓 가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구성 방식이다. 산만하게 써 내려가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무질서한 듯 하지만, 내적으로는 나름대로 탄탄한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 주제를 형상화한다.

긴축 구성은 모든 요소를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질서 정연하게 전개하는 구성 방식이다. 잘못하면 기계적인 구성이 되기 쉬운 단점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통일된 인상을 주고 주제를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밖에도 수필의 구성 방식에는 시간이나 공간 이동에 따라 구성하는 직렬적 구성, 작품의 각 부분들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제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병렬적 구성 등이 있다. 기행문은 대부분 직렬적 구성은 취하고, 생활 주변에서 느끼는 단상(斷想)을 표현한 작품은 병렬적 구성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13. 일상의 참신한 해석을 위하여

홍 억 선

1.

매달 쏟아지는 수필집과 작품들을 보면서 바야흐로 수필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실감한다. 지난 세기에 서구의 무한 우주관이 온 세계를 뒤덮으면서 이미 수필의 시대는 예견되었다. 더구나 모든 장르들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해체와 짝짓기를 거듭하는 퓨전 시대를 맞아 가장 폭넓은 장르로서의 수필문학이 미래문학을 추동해 나간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한 겹 가려진 막을 열고 내면을 들여다보면 수필 문단의 풍요로움이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향상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거나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문학성의 시비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상업주의와 적당히 결탁한 타 예술인들이 이러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약간의 정보와 흥미를 곁들인 애매한 잡문으로 수필 문단을 어지럽히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수필 마당에 이처럼 멍석이 번듯하게 깔렸는데도 왜 수필가들은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위세를 부리지 못하고 관객들의 눈밖에서 밀려나고 있는가? 식상할 대로 식상한 지적이겠지만 이 책임은 결국 수필가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몇몇 수필가들의 치열한 창작 정신에도 불구하고 형상화되지 않은 일상을 신물나도록 되새김질하는 안일한 매너리즘이 '수필 쓰고 있네'라는 비아냥거림을 불러들이지 않았는가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격랑이 휘몰아치는 세기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규모와 빠르기를 짐작할 수 없는 물살에 실려 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의 영역들이 생존을 위한 탐색전을 곳곳에서 벌이고 있다. 이는 지나간 시대에서 일어났던 일과성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세기에서 재편성될 장르 설정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필 문단의 현실은 미동도 않는 훼리호의 특등실에서 격랑의 바다를 외면한 채 자기들만의 축제를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평자는 안티 에세이(Anti-Essay)에 대한 논의를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그러나 반수필(反隨筆)로 해석되는 안티에세이란 용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겠다. 선배 수필가들의 업적을 조금이라도 폄훼하고자 함이 아니요, 기존 수필의 정통성을 배타적인 안목으로 접근하자는 뜻도 아니다. 단지 통시적 관점에서 어떤 조류(潮流)가 맹아(萌芽)하여 꽃을 피우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예비하듯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수필 문단에 발전적인 바람을 불어넣어 보자는 새수필 운동쯤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수필 형식의 이론 정립이 시급하다. 흔히 수필을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수필의 한 특성을 지정하는 말은 될 수 있어도 수필 형식의 정의는 될 수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예술의 갈래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있었던가. 모든 예술은 형식과 내용이 상호간에 치열한 각축을 벌이면서 미적 가치를 담아왔다. 수필이 여느 장르와 달리 폭넓은 그릇이라는 장점을 내세워 삶의 총체적인 진실을 담아왔다고는 하지만 자유로운 형식이 오히려 내용 일변도의 잡다한 문학으로 몰아갔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수필 형식의 이론 정립을 위한 토론은 서둘러 전개되어야 하겠다.

이와 함께 실험 수필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수필을 '붓가는 대로 쓰는 글'로 주저 없이 해석하면서 '시도하다'라는 실험성이 함축된 'Essay'의 어원을 굳이 도외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수필의 실험성은 다양하게 시도될 수 있으며, 이를테면 시로부터 운율을 차용할 수 있을 것이고 희곡으로부터 막과 장의 구성법을 인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허구성 문제도 전향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 수필이 언어를 표현 매체로 삼는 이상 언어의 분절성, 추상성으로 인한 허구적 표현은 불가피하다. 또한 일상을 문학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욕망 개입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젊은 수필가들의 출현은 수필 문학의 기름진 토양과 미래를 위하여 더욱 간절하다. 수필을 40대 이후에나 쓰는 중년의 문학이라고 곡해하여 황혼기의 파적거리쯤으로 여기는 풍토는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 청년 이상(李箱)의 수필이 다이아몬드라면 피천득의 수필은 비취다. 이상의 수필이 쇳물에서 끓는 정열의 불꽃이라면 피천득의 수필은 운치 있는 관조의 가로등과 같은 것이다. 이 중에 하나를 취하였다고 어찌 하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젊은 수필가들의 출현을 위해서는 대구 수필문단의 준령과도 같은 '영남수필문학회', '대구수필문학회' 등 수필문학 단체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차대하다. 그 외에도 아직은 작은 몸짓이지만 뜻밖에도 크게 감지되는 몇몇 수필 창작 교실의 움직임도 내일의 대구수필을 위해 주목해야 할 것이다.

평자가 자성을 앞세워 수필문단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한 것 같아 스스로 곤혹스럽다. 혹자는 이러한 지적이 지루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저급한 잡문들이 수필문학의 본질을 어지럽히는 한 이러한 지적은 계속되어야 한다.

2.

대구문학 지난호에는 특집으로 마련된 이재호의 수필 여덟 편을 비롯하여 모두 열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재호의 작품 읽기에는 함께 수록된 그의 '문학적 자전(自傳)'이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사족을 붙이면 그의 작품을 일관하는 '돌아오기'와 '들여다보기'의 작업이 감동적이다. '돌아오기'와 '들여다보기'는 귀소본능 또는 과거 지향적 노스탤지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우연인지 의도된 선작(選作)인지 몰라도 8편의 작품 중에는 기행수필의 옷을 빌린 작품이「사벌 왕릉을 찾아서」를 비롯하여 절반이나 된다.

이천 년이 고스란히 진공된 어느 부자 상인집 정원에서 여독을 풀며 베수비오 화산 위를 흐르는 흰구름을 보다 문득 고향의 사벌 왕릉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흩어진 산성의 흔적들. 철저히 풍화되고, 세월의 지층에 매몰된 왕국의 古邑. 암호같이 널려 있는 기왓장, 돌들.

세월의 이끼에 전설도 잃어버린 왕국의 황량한 왕릉이 그리움 같이 떠올랐다.

'참 어리석게도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이 진기한 곳에 왔으면 감탄하면서 열심히 구경할 것이지, 엉뚱한 사벌 왕릉은 왜 생각해' 하면서도 향수처럼 사벌 왕릉을 환상했다. -이재호,「사벌 왕릉을 찾아서」中에서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길떠나는 몸짓을 하면서도 결국 탄력 좋은 고무줄에 매인 듯 돌아오는 길을 밟는다. 그가 왜 그렇게 '돌아오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그가 간직하고 있는 삶의 흔적에 깊은 애착을 느끼는 듯하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 흔적이 낡은 영사기의 화면인지, 순간순간 멈추었던 매듭의 시간인지는 몰라도 그가 지향하는 바는 소우주와 통하는 길임에 틀림없다. 소우주는 자아이고 자아는 중심이다. 중심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명징한 가슴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애써 잘 차려입은 자신의 옷을 한꺼풀씩 벗으며 '돌아오기'와 '들여다보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김금수의 「요시하라 선생傳」은 앞에서 언급한 이재호의 작품 중에「석 장의 지폐」와 닮은꼴이다. 글감은 물론이고 만남-사별-그리움으로 이어지는 구조까지 흡사하다. 두 작가는 이 작품을 쓰고 싶어 오래 별렀을 것이다. 험난한 인생 항로에서 자아의 실존을 가능케 한 부모와 이에 버금가는 은사(恩師)에 대한 글쓰기는 문학적 형상화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문학인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대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감상에 치우쳐 그 앙금은 천편일률로 남기 쉽다. 다시 말해 누구나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있기에 공명의 진폭은 쉽게 넓힐 수 있으나, 감동을 뛰어넘어 이상과 꿈에 이르는데는 한계가 있어 이러한 글의 양산(量産)을 경계하는 것이다.

최계순의 「사랑의 환희」를 대하면서 약간의 우려가 앞섰다. 너무나 흔한 글감이기도 하였거니와 한국 수필가들은 개별적인 체험을 다루는데는 세련된 반면 관념적인 사유를 다루는 작업에는 익숙하지 못한 경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계순은 절묘한 기교로서 이러한 우려를 깨끗이 씻어냈다. 그는 마치 언어의 조련사처럼 다의적인 함축어의 덩어리들을 적재적소에 연결함으로써 넋두리에 불과한 사랑타령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를 나만큼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참으로 위대하고도 신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옮겨지는 그래서 한 사람의 취미와 성격과 살아온 세월들을 알아가면서 비로소 만나보지 못한 한 세상과 이해라는 이름의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그 특별한 매혹과 이미지와 집중력은 생애의 날들에서 얼마나 희귀한 날들로 각인되는가. 그 사이에 끼여 있는 목마름과 뚜렷한 생기와 탄력과에 뜨거운 에너지의 창출은 평범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어떤 길이다.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묘미에 취해 보면서 그대 사랑의 환희에 절절 끊어 볼 것이다. 사랑이 가리키고 있는 곳, 그 끝없는 욕망의 집착과 도취와 흔들림 속에서 때론 피곤과 실패의 연속일지라도 그 욕망의 끝은 늘 황홀한 시작인 것이다. -최계순, 「사랑의 환희」中에서

인용문을 보다시피 미려한 문장이다. 때로 미문(美文)은 내용이 없다는 공격을 받기는 하나 관념어, 추상어, 함축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행간을 키우고 의미를 증폭시키는 기교는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하다.

이원우의「거짓말」은 과대광고, 거짓 광고의 부작용을 글감으로 삼아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본 현실 인식의 수필이다.

문학은 어떤 형태로든 그 시대와 사회를 담고 있으며,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품들은 문학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그러므로 작가가 현실에 대해 소신을 표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가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만나면 비류직하의 폭포처럼 곧은 소리를 내야 한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르기 때문이다. 이원우는 엄정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곧은 소리를 내는 수필가이다.

거짓말로 인해 고통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믿은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 고통뿐이라면, 그로 인해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만연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는가?

악의에 찬 거짓말이 없어졌다는 거짓말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이원우,「거짓말」中에서

이 작품에서 반영하고 있는 현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적 편린들이지만 그 문제들을 어느 시대나 항구적으로 안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는 작가의 힘이 주목된다. 사실 이원우는 불교의 참선을 연상하듯 존재의 본질을 놓고 내적 자아와 은밀히 수수하는 작가로 독자들에게 낯이 익다. 그러나 애초에 그의 천품은 이지(理智)에 가까운 쪽이고, 거기에다 사회적 직분이 맞물려 현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려는 경향이 탄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배화열의 「생활인의 축제」를 읽는다.

인용문을 대신하여 작품의 요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축제는 신성함과 즐거움을 주는 의식 행위다. 그 과정이 즐거움이고, 과정을 통해 거듭나는 결과가 신성함이다. 친구와의 술자리가 축제요, 결혼식과 제사의식도 축제요, 종교 의식도 축제다. 축제는 반드시 속죄양을 필요로 한다. 술자리에서 희생양은 상대방, 가정, 직장, 나라가 된다.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를 희생양으로 삼고, 제사에서는 조상, 종교에서는 신이 속죄양이 된다. 축제는 이들 희생양을 통해 구원을 지향한다. 구원은 축제 참여자의 거듭남으로 확인된다.

나아가서 문학도 주인공을 희생양으로 삼는 축제다. 결국 문학 활동은 휴머니즘과 카타르시스를 포함한 인간 구원을 지향하는 축제 행위다

다소 작품이 거칠고 난해하여 정리가 쉽지 않았지만 본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배화열은 논리적인 글을 쓰는 수필가다. 그러나 그의 글이 수필에서 한 발 비껴나 철학이나 윤리학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그는 삼십 년이 넘도록 독서회를 이끌어 오면서 동서 고전과 현대문을 두루 꿰찬 보기 드문 독서력의 소유자이다. 최근 그가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모든 문학작품을 미학의 잣대로 해석· 분류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생활인의 축제」도 미의식의 범주에 속하는 구원미나 희생미를 축제에 대입하여 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생소하게 보이겠지만 독자적인 영역을 넓히려는 고뇌의 작업임에 틀림없다.

윤길수의 「봉봉 타는 아이들」을 읽으면서 수필의 재미를 느낀다. 일상을 참신하게 형상화하여 마치 수필 작법의 텍스트를 보는 것 같다. 수필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일상'을 '신변' 운운하면서 낮춰보려 한다. 수필가가 일상을 떠나서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일상이 아니라 참신한 해석의 도달 여부에 있다.

「봉봉 타는 아이들」은 작가가 글의 짜임을 이미 다섯 단락으로 가름해 놓았다. 하지만 1,2 단락을 하나로, 4,5 단락을 하나로 묶어 모두 세 개의 단락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1,2단락에서는 일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였고, 3단락에서는 과거 회상을 통해 일상을 자아에 오버랩시켰으며, 4,5단락은 일상을 내면화하였다. 3단락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으므로 결국 이 작품은 1,2단락과 4,5단락으로 양분된다. 그렇게 보면 어쩐지 전반부가 후반부에 비해 지루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거뜬히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한 것은 글의 구조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봉봉을 타는 유소년과 퇴행성 관절염에 시달리는 노년이 날줄과 씨줄로 얽어 있으며, 유소년의 상승 이미지와 노년의 하강 이미지가 또 다른 그물을 형성하여 틀을 이룬다.

순리를 거슬러 가는 사고의 파격도 이 작품을 살리는 요소이다. 퇴행성 관절염을 앓을 만큼 긴 여정을 달려온 노년이 오히려 유소년으로부터 상승 이미지를 학습하겠다는 발상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어디에도 어렵게 읽히는 곳이 없다. 그렇다고 고뇌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솜뭉치에 물이 스며들 듯 삶이 소리 없이 녹아 있다. 좋은 수필은 이처럼 쉽고 재미가 있으며 곱씹을수록 새롭게 우러나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박명희의 「친구의 이야기」는 수필의 시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수필은 '나'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대부분이다. 수필이 고백의 문학이고 보면 당연한 이치다. '그는 프라스틱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로 시작하는「친구의 이야기」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다. '나'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 '그'의 이야기를 하거나 '그'의 말을 '나'가 듣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불편한 인간 관계의 짐들을 어쩌면 저 거울을 바라보며 정리하였을지 모른다. 후둑후둑 찬물로 대강 세수를 한 후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더러운 것은 비누로 깨끗이 씻어내고, 입안 가득 모여 있는 찌꺼기까지 양치질로 헹굼을 하여 저 거울 앞에 서서 중간쯤으로 정리하였을 것 같다. 비록 태어날 당시의 순백의 영혼이 아닐지라도 그 가까이 다가서려 노력하였을 것 같다.(중략)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두고 가더라. 손을 펴니 잡은 것 주루루 흘러 모두 두고 가더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두고 가더라. 모두 두고 가더라. 투명한 피부빛을 한 아들과 사과를 깨어무는 딸의 모습도 두고 가더라. 청자빛 도자기와 삼성자동차도 두고 가더라. 날마다 쓸어안고 자던 양피 지갑도 두고 갔으며, 흐뭇하여 달고 다니던 명찰도 두고 가더라. 울타리 안으로 침입한 먼지를 못마땅한 듯 쓸어내던 프라스틱 빗자루도 두고 가더라. 닳지 않고 오래 쓰기 위하여 철물가게에서 산 것인데 그 빗자루도 두고 가더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두고 가더라. 모두 두고 가더라.

-박명희, 「친구의 이야기」中에서

수필이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때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남의 이야기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점의 다양화는 수필가 정진권에 의해서 여러 번 시도된 바 있다. 정진권은 수필이 굳이 1인칭 주인공 시점만 고집할 이유가 없으며, '나'아닌 '나', '남'의 이야기, 사람이 아닌 '나', 또는 '그'에 따라 시점이 자유롭게 정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평자도 지난 해 대구문학 겨울호에 '나'가 아닌 '남'을 1인칭 주인공으로 설정한 졸작「화령별곡」을 발표하여 시점의 실험성을 시도한 바 있다. 시점의 다양화는 결국 수필의 허구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므로 앞으로 수필문단에서 많은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그 외에 박달원의 「산골마을 사람들」과 한팔용의「가정의 달에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자」도 노작으로, 앞으로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할 작품들이다. 특히 「산골마을 사람들」은 동화와 서간문의 요소가 혼재되어 다각적인 토론이 필요하며,「가정의 달에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자」는 교훈 수필에 관한 논쟁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제한된 지면으로 평을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출처 : [ 전북펜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북위원회
글쓴이 : 전북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