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지금 여기에/아이의 노래

[스크랩] 좋은 동시 요건_김제곤

사랑빛 2014. 11. 18. 15:06

좋은 동시의 요건


김제곤


좋은 동시란 어떤 동시를 말할까? 보는 사람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말을 할 수 있겠다. 나는 동시의 요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를 회화성에 둔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왜 이런 말이 있잖은가. 이때 그림의 소재가 되는 것은 사실적인 풍경일 수도 있고, 생활의 일부분일 수도 있으며 마음에 떠오른 심상일 수도 있겠다. 눈과 마음을 통해 다가온 감흥을 시인은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그려낸다. 이때 그 그림을 선명하게 잘 그려낸 시(회화성을 갖춘 시)를 나는 좋은 시라 생각한다.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는 시에는 단순하되 투박하지 않은 시적 진술이 들어 있다. 투명하되 거기에는 어떤 울림이 들어 있다. 좋은 동시는 꼭 필요한 말들만 써서 보여 주고 싶은 그림을 보여 준다.


동네가 있는 곳엔/ 공동샘이 파 있고,/
물 이는 색시 뒤엔/ 신둥이도 딸지요.//
동네가 있는 곳엔/ 미루남구 서 있고,/
커다란 남구 위엔/ 까치집도 있지요.//
동네가 있는 곳엔/ 조모래기 있구요,/
조모래기 있는 곳엔/ 노래가 있지요.


권태응이 쓴 <동네가 있는 곳엔>이란 동요다. 내가 이 시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 시가 선명한 그림을 대신할 만큼 회화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는 이 시에 쓰인 시어는 놀랄 만큼 단순하다. 여기서 시인은 아주 단순한 몇 마디 시어로 사람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소박한 시어는 제가 보여 줄 수 있는 세상을 온전히 보여 준다.


특히 이 시에선 3연이 예사롭지 않다. 동네가 있는 곳엔 조모래기가 있고, 조모래기 노는 곳에 노래가 있다는 진술은 참 탁월한 발견이다. 그건 우리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저 예사롭게 넘기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시인이 그걸 발견한 것인데, 그걸 진술하는 시어는 아주 단순한 말로 되어 있다.


황소 앞에 병아리는 염치도 없지/ 죽 먹을 때 콩알만 개평대지.//
그래도 황소 눈은 아니 노하지/ 그래도 병아리는 눈이 무섭지.//
화경만한 황소 눈 자꾸 무서워/ 한 알갱이 쪼아먹고 갸웃, 갸웃/
두 알갱이 입에 물고 또 갸웃, 갸웃.//

현동염이란 시인이 1949년도인가 쓴 시다. 해방기에 월북한 분인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이분이 쓴 <모기와 황소>라는 동화가 그림책으로 얼마 전에 나온 적이 있다. 이 시를 보면서도 그 장면이 아주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어 역시 위에서 살펴 본 권태응의 작품에서처럼 화려한 수사를 찾아볼 수 없다.

쟁기질/ 소가/ 욱-욱- 가네.//
땅이/ 푹푹/ 푹 푹 파지네.//

김오월이 쓴 <논갈이>란 시다. 군더더기 없는 2연 6행의 아주 짧은 시다. 그러나 쟁기질 하는 소의 모습은 눈앞에 선명할 정도로 그려진다. 그것은 정지 화면으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소의 실감으로 전해져 온다. 소가 내뿜는 입김하며 쟁기를 끄는 소의 힘찬 동작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 이런 생생한 실감은 무엇보다 사물을 정직하고 명쾌하게 바라볼 줄 아는 시인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좋은 동시들은 대개 단순성에서 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몇 개의 언어들을 가지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힘을 보여 준다. 이처럼 좋게 느껴지는 동시들의 시어는 대부분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직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그리는 형상은 아주 선명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동시는 어떨까? 외화적(外華的)인 수사는 늘었을지 모르나 정작 회화성이 느껴지는 시를 찾기는 어렵다. 수다스러운 말과 화려한 비유를 쓰는 데 능한 것 같지만 정작 그림의 알맹이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요란한 언어를 동원했는데 그림이 안 그려진다면 그건 언어를 낭비한 것과 같다. 언어를 낭비하는 것은 쓸데없이 시를 어렵게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 산골 소녀는 늘 노래를 불렀지.//
꽃잎으로 엮어 만든/ 광주리를 이고서/ 그 안에//
산새 울음 담고/ 냇물 소리 담고/
소슬바람 솎아낸 햇살을 담고 담아//
내 어머니 같이/ 함초롬히/ 고샅길 돌아 나오며

들국화라는 제목의 동시인데, 내가 보기에는 동시로서 여간 난해한 시가 아니다. 이것은 어느 신문 신춘문예에 뽑힌 작품이다. 일단 이 시의 앞만 보면 들국화 닮은 어떤 산골소녀를 보고 그린 작품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1연에서 그 산골소녀는 노래를 늘 불렀다고 진술이 된다. 그러니까 문맥으로 보자면 2연부터 4연까지는 그 소녀가 ‘무엇무엇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를 보여 주는 부분이 진술되어야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겠다. 그러나 2연에서 꽃잎으로 광주리를 엮어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부터가 탁 걸린다. 광주리는 대, 싸리, 버들 같은 나무로 엮어 만든 일종의 나무 그릇인데, 이게 보통 지름 크기가 어른의 한 아름쯤 되는 그릇이다. 들밥 이고 갈 때 떡 같은 음식 담아 둘 때 흔히 이 광주리를 많이 쓰지 않았나. 요즘 고무 다라이가 대신 하지만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광주리가 흔했다. 그런데 꽃으로 아니 꽃잎으로 광주리를 엮어 만들었다고? 도대체 그 꽃광주리 모습이 어떤지를 그림으로 한번 보고 싶다. 그런데 이 구절만 봐서는 도무지 그 형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3연을 보면 이 꽃잎으로 엮어 만든 광주리에 세 가지 것이 담긴다. 산새 울음과 냇물 소리와 소슬바람을 솎아낸 햇살이다. 그제야 산골소녀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 들국화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꽃잎으로 엮은 광주리를 이고 섰다는 것은 알고 보니 들국화의 형상을 그린 것이었다. 시인은 그 꽃이 마치 광주리를 이고 있는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느껴진 것이겠다. 함초롬히 피어 있는 모습이 광주리를 이고 고샅길을 돌아 나오는 어머니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들국화는 노래를 부르는 산골소녀로, 꽃 광주리를 인 어머니로 이렇게 비유가 된 것이다. 하나의 사물로도 비유가 안 되고 여러 개의 사물로 아주 복잡하게 비유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를 읽으면 어떤 영상이 선명히 떠오르기보다 뭔가 좀 어리둥절하고 어렴풋한 인상을 갖게 된다. 들국화가 산골소녀라는 발상은 국화를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하고 노래했던 어떤 시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이 시인이 가졌던 발상이라면 아주 식상하고 상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 시에 드러나는 시적 정서가 요즘 아이들과 얼마나 친근한가를 생각해 보는데 그것 또한 일방적인 어른 취향이라는 것이다.


손이 천 개라도 모자라겠다./ 안마당 고추멍석에다 고추를 말리는/ 가을 햇살이 종종댄다./ 가을 햇살은 바쁘다./ 엉덩이 한번 붙이지 못하고/ 참깨멍석으로 껑충 뛴다./ 뒤적뒤적 참깨를 뒤적이다가 딸깍/ 콩깍지 속의 샛노란 콩을 깐다./ 그것만이 아니다./ 담장 위에 누운 호박덩이 익히랴/ 모과둥치 모과덩이 익히랴/ 뜨락 밑의 채송화 꽃씨 여물리랴/ 가을 햇살은 바쁘다./ 수레를 끌고 들어오는 / 아버지 어깨 위의 콩메뚜기/ 거기에도 깡충 뛰어올라/ 가을 햇살은 콩메뚜기를 살찌운다./ 참말이지 손이 천 개라도 모자라겠다./ 가을 햇살은

한 중견 시인이 쓴 <손이 천 개라도>라는 시다. 근래 어느 문학잡지에 발표된 시다. 가을은 참 바쁜 계절이다. 사람도 바쁘고 동물도 바쁘고 식물들도 바쁘고 그러니 가을 햇살 또한 바쁘지 않을 수야 없겠다. 어찌 보면 그럴 듯한 인상을 주는 시다. 그런데 이 시를 가만히 보자. 이 시는 뭔가 그림을 그리려고 애쓴 시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그림이 선명하게 와 닿지 않는다. 원인은 가을 햇살의 의인화에 있겠는데, 이것이 일단 자연스럽지 않다. 햇살이란 것이 입자처럼 퍼지는 성질을 가진 것인데 여기서는 그것이 손을 가진 한 사람처럼 묘사가 되니까 아하 참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일단은 머리를 갸웃거리게 된다. 아동문학에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의인화 수법을 쓰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되어야지 아무렇게나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어색함을 줄 때가 있다. 일단은 이 햇살의 형상이 영 자연스럽지를 못하니까 시인의 수다스런 말들이 아름답게 와 닿지 않고 피곤함을 준다. 이 시인이 좀 오버해서 그림을 그려대고 있구나 이런 반발심이 생긴다.


가을 햇살이 벼를 익히고 과일을 익힌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는데 이 시가 그런 보편적인 상식 말고 세계 속에 가려진 시적 진실을 드러내는 점이 뭐가 있는가? 시인은 단지 가을 햇살을 사람처럼 바꾸어서 그려 보자는 발상을 무기로 해서 시를 억지로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또 하나, 좋은 시는 선명한 그림과 함께 자연스러운 리듬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런 호흡이 아예 배제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시인이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든다. 가을 햇살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형상화하자니 시의 호흡 또한 그것을 따라 빨라져야 했겠다. 그러나 호흡이 시종일관 급하게 진행되다 보니 본디 시가 지니는 리듬의 묘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본디 시의 리듬은 긴장(들숨)과 이완(날숨)의 자연스러운 반복 속에서 살아나는 것인데, 이완은 없고 긴장만이 시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시가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는다.


댑싸리나무/ 한아름/ 고염나무/ 한 포기/
뜰 앞에서/ 조으는/ 암탉 한 마리/
우리 집 마당은 고요합니다.//
서리 맞아/ 시들은/ 풋고추 하나/
햇볕 보고/ 다시 사는/호박순 아기/
우리 집 가을은/ 고요합니다.

말 그대로 아주 고즈넉한 가을 풍경을 그린 시인데, 그 그림이 아주 선명하다. 2연에 가을 햇살이 나오는데 여기선 호박순 아기가 주체가 된다. 늦가을이라 모든 식물들이 시들어 가는데 하필이면 지각생 호박순이 하나 고개를 내밀었다. 제법 새벽에는 서리가 내리는 가을이라 추우니까 이게 순을 뻗지 못하고 시들시들한다. 그러다가 낮에 가을 햇볕을 보고 이제 반짝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같은 가을 햇살을 그린 시지만 이 작품이 앞의 작품보다 더 선명한 그림을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의 시는 뭔가 관념에 의해 씌어진 시 같다면 이 시는 제법 사물을 세밀히 보고 쓴 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최순애가 13살 되던 해 ≪어린이≫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강아지가 먹고 남긴/ 밥은/ 참새가 와서/ 먹고//
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 쥐가 와서/ 먹고.//
쥐가 먹고 남긴/ 밥은//
개미가 물고 간다./ 쏠쏠쏠 /물고 간다.

이상교 시인의 <남긴 밥>이란 시다. 이 시 또한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다. 단순하고 명료한 시다. 이것은 있는 사실을 그린 시라기보다 시인의 마음속에 떠오른 심상을 그린 시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이 무슨 관념에 기대어 있다는 생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림으로 다가오는 시다. 그림이 구체적이라는 것은 시인이 보여 주고자 하는 세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독자들의 눈길을 붙잡아 둘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 된다. 이 시에는 자연스러운 리듬 또한 살아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시에는 긴장(들숨)과 이완(날숨)이 적절히 반복되고 있다. 구체적인 그림과 자연스러운 리듬의 어울림은 이 시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한 식구로 어울려 사는 목숨들 간의 조화를 노래하고 있는데, 그것이 또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의 눈에 음식쓰레기로밖에 보이지 않을 개밥 속에서 시인은 강아지와 참새와 쥐와 개미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하고 있다.


시를 쓰는 일은 어렵고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 괴로움은 “사물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자 할 때 오는 ”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안이하고 상투적인 발상으로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시를 짓는 것은 그러한 괴로움을 회피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괴로움을 회피하는 데서 비슷비슷한 것이 양산되고, 그것들은 또한 독자들에게 자꾸만 외면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008년 8월 28일)


<글과그림> 2008년 9월호

 

 

 

출처 : 물꼬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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