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지금 여기에/책사랑

[스크랩] 수필강좌 - 수필의 모든 것 9

사랑빛 2014. 11. 18. 15:02

41. 기록과 수필

기록은 사실의 객관적인 서술이다. 주관적인 진술을 배제한다. 인간의 삶과 인생을 그리는 데 있어선 사실의 전말을 서술하는 것만으론 만족스럽지 못하다. 사실과 행위에 대한 기록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느낌과 견해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수필의 구성에 있어서도 체험(사실)과 느낌(주관)을 어떻게 배분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일기, 기행문에 있어서도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라면, 기록문에 불과하다. 작자가 겪은 체험담, 에피소드, 일 등을 사실대로만 써 놓은 글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기록문은 그 자체로서 가치성이 있는 것이지만 문학작품은 아닌 것이다. 문학은 체험과 상상으로 작가가 발견한 인생의 이치와 진리, 깨달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개성과 독자성과 창의성에 의한 의미부여와 가치창출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체험(사실)을 토대로 인생과 발견과 의미를 담는 그릇인 만큼, 어디까지나 작자의 느낌과 함께 해석이 있어야 한다.

(1) 체험의 서술

(2) 체험 + 느낌

(3) 체험 + 느낌 + 인생과 결부한 의미부여

(4) 체험 + 느낌 + 인생과 결부한 의미부여 + 감동

체험과 느낌의 배분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곤 할 수 없다. 소재 및 주제에 다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며, 작가의 개성과 구성 기법에 따라서 달리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것보다는 조화가 있는 쪽이 더 좋은 효과를 얻는 경우가 많다.

①은 자신이 겪은 대로 쓴 것이어서 기록문에 불과하다.

② 수필이 되려면 체험과 느낌이 조화를 이뤄야 함을 말한다. 체험이 많고 느낌이 적을 땐 정서감이 부족하여 딱딱하게 느껴지고, 체험이 적고 느낌이 많은 경우엔 추상적이고 현실감의 결여를 느끼게 한다.

③의 수준이면 수필에 진입한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창출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인생의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④의 경우엔 ‘감동’을 주문하고 있다. 수필이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한 글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나 인생의 의미를 일깨우고 읽는 보람을 안겨 주기 위해선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동’은 문학성의 핵심 요소이다.

4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문학의 소재 발견이나 창작에 있어서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등 5감각(感覺) 기능을 잘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보는 것은 글을 쓰고 싶은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기능을 한다.

숱한 소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제재(題材)로 선택할 것인가? 이는 사람마다의 안목과 경지에 따라 달라지며,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여행지에서 유적이나 풍경을 함께 접했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시각에 따라 보석처럼 빛나는 제재를 얻을 수도 있고, 그냥 스쳐버릴 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사물이나 사건을 보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 문학을 하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다름없다.

18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앞면만, 어떤 사람은 측면만, 어떤 사람은 뒷면만 볼 수 있다. 어떤 사태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일부분만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의 삶을 통한 총체적 경험과 지식 정보를 투과해서 인식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가시영역의 것일 뿐, 지하의 불가시영역의 뿌리는 보지 못한다. 또한 나무의 보이는 모습과 접촉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이를테면 햇빛, 바람, 비, 세월, 새, 나무의 일생을 연상해서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닿아있는 세계까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보는 것은 눈을 통한 ‘가시영역’에만 국한돼 있다. 그리고 가시영역의 대상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수필을 쓰는 법을 깨닫는 일이다.

새를 보면서 단순히 보이는 외양만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구름, 자유, 방향, 바람, 새의 삶, … 이런 불가시영역의 것까지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꽃의 외양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꽃의 보이지 않는 세계, 꽃씨가 새싹을 튀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햇빛, 물, 바람, 나비 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꽃이 져야 할 때와 의미까지를 보아야 한다.

‘본다’는 것은 충동, 발견, 관찰, 탐구와 관련이 돼 있다. ‘본다’는 행위가 오감과 닿아있을 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43. 드러내기와 드러내지 않기

수필은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다. 자조문학(自照文學), 고백문학이라고도 한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거울에 비춰내듯 드러내는 글이다. 허위, 과장이 아닌 진실과 순수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준다.

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드러내는 모습을 취하고, 독자들은 글을 통해 작자의 삶과 인생을 보게 된다. 작자는 심리적으로 자신의 장점과 좋은 점을 보이고, 단점, 취약점, 잘못한 일 등은 감추고 싶어 한다.

형용사와 수식어를 남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독자를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드러내는 문학이라고 하지만, 독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선 안 된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드러내는 행위는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삶과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독자들은 성공담보다도 오히려 실패담에서 교훈을 얻으며, 화려하고 위대한 일보다 소외되고 눈에 띄지 않은 것에 대해 애정에 관심을 갖는다. 작가가 자랑, 과시, 좋은 점만을 드러내지 않고 나쁜 점, 취약점도 드러내 성찰의 모습을 보여주길 독자는 바라고 있다.

글을 쓰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드러내야 할 것은 반드시 드러내야 하고, 드러내지 않아야 할 것은 반드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진실 앞에서 생사를 걸 수 있는 문제까지 대두될 수 있는 문제다. 드러내야 할 것은 개인성, 일과성, 일시성이 아닌 공공성, 지속성, 영원성이 있는 가치와 의미에 닿아 있어야 하며, 절제하거나 드러내지 않아야 할 것은 자랑, 과시, 과장, 증오, 분노 등 독자들의 삶과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44. 교훈과 깨달음, 지식과 지혜

문학의 2대 기능으로 쾌락성과 교도성을 들고 있다.

문학 작품은 방법은 다를 지라도 교도성을 띠게 된다. 문학은 교육이 아니므로 직설적인 교도, 설득, 설파는 거부감을 갖게 한다. 문학작품은 감동을 통해 변화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 작자가 독자들 보다 높은 위치에서, 지식의 전파와 경험을 설파하려는 것은 독자를 경시하는 태도일 수 있다. 지식의 나열이나 교도성에 치우친 수필이 의외로 많음을 본다.

수필은 교훈보다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지식은 바깥에서 들어온 앎이다. 독서, 얘기, 교육을 통해서 비교적 빠른 시간에 습득할 수 있다. 지혜는 내부에서 형성된 앎이다. 체험을 통해 자신이 피운 깨달음의 꽃이다. 단시일에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고, 오랜 시일이 필요하다. 지식은 이미 보편화된 것이지만 지혜는 스스로 피워낸 깨달음이므로 특수성을 지닌다.

수필은 지식의 나열이 아닌 지혜의 꽃과 향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교훈보다 깨달음, 지식이 아닌 지혜를 보여주어야 하는 글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아야 한다. 독자자 스스로 생각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하고 마음에 여운을 주어야 좋은 글이다.

45. 무조건 쓰라고?

김서령/칼럼니스트

글을 써라. 어떻게? 그냥 써라. 아니 어떻게 그냥? 무조건 써라. 아니 어떻게 무조건?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건 시작이다. 도무지 뭘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할 때 무조건, 그냥 , 아무렇게나 ! 한 문장을 시작해버려라 . 눈에 보이는 아무 단어나 우선 써 버려라. < 전화기를 본다.>이렇게! 그게 바로 오늘의 글감이다.

글감은 당신의 기억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가 당신이 원할때 얌전하게 차곡차곡 순서대로 나타나 줄만큼 인심좋지가 않다. 되려 떠올리려 할수록 천리만리 도망가버리는 심술쟁이다.

뭘 쓸까? 막연히 살아온 모든 날을 뒤지면서 백날 엎드려 있어봐도 떠오르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책상 서랍을 다 뒤집어엎고 밀린 빨래를 다 치대서 널어도 뾰죽한 생각이라곤 단 한 개가 떠올라주지 않는 절망, 아마 신물나게 경험한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잘하니까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라,가 절대 아니다.)

첫 마디를 일단 써놓고 보라는 것은 글의 중요한 속성을 암시한다. 글이란 조용히 앉아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 것이라는 미신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조용하면 생각의 가닥을 잡기가 쉬울 것 같지만 깡그리 조용하기만 해서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기 십상이다. 온통 헤집어야 한다. 그럴 필요가 있다. 헤집는 것이 바로 아무렇게나 첫 문장을쓰는 일이다.

이 첫 문장은 십중팔구 나중에는 지워진다.지우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원고지에 쓸 것도 아니고 아까운 종이를 찢을 필요도 없는 컴퓨터 글쓰기인데 망설일 게 무언가.

첫 문장은 그냥 생각을 퍼올리기 위한 마중물 같은 거다. 마중물이라는 이쁜 이름 아는가? 펌프물을 퍼올릴 때 그냥은 물이 길어지지 않으니 우선 물 한바가지를 펌프 안에 부어줘야 순순히 아래물이 딸려 올라오는데 지하수를 마중가는 물이라고 누군가 멋진 인간이 그런 이름을 붙여놨다.

글이란 미리 생각하고 나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생각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글의 주술이다. <저 혼자 생명이 있어 앞 문장이 알아서 뒷문장을 끌고 간다.>-- 이건 소설가 신경숙을 만났을 때 그녀가 수줍게 고백했던 말이다.

쓰는 사람은 그저 끌려가는 대로 연실을 풀듯 가만히 얼개를 쥐고 있기만 하면 된다. 하늘에 팽팽하게 연을 띄우듯 그 당김과 이끌림을 손아귀 힘으로 적적히 조절하며 뿌듯하게 차오르는 긴장과 쾌감을 음미하기만 하면 된다. 이럴때 우리의 뇌하수체 시상하부는 엘돌핀과 도파민과 그에 준하는 강력한 호르몬을 품어낸다.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손에서 나온다. 쓰는 행위에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생각이다. 그러니 일단 첫문장부터 써라.

물론 미리 구성을 완벽하게 해놓고 쓴다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래도 쓰는 중에 원래 구성과는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고 처음의 계획을 수정해서 기꺼이 글의 고집에 항복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글쟁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첫 문장을 막연하게 써서는 안된다. 삶은 허무하다,느니 사랑은 영원을 지향한다,느니 식이 돼서는 참된 시작이라고 할 수 없다.

아주 구체적이고 자기가 잘 아는 내용에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내부에 관념의 철사줄을 줄줄 뽑아올릴 용광로가 있다면 별 문제겠지만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도 첫문장을 그렇게 시작해서는 철사 자체를 뽑아올리기가 어렵게 되어있다. 인간은 그렇게 관념으로 뭉쳐있을 수가 없는 살아있는 생생한 생물인 것이다. 관념적 사변적 글쓰기가 한 때 대단해보이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젠 아무도 그런 것에 기죽지 않는다. 요컨대 살아있는 글쓰기가 돼야 한다. 살아있는 글쓰기란 구체적인 일상 속의 사물과 사건들에서 생각을 풀어내야 한다는 소리다.

<전화기를 본다.> 이 짧은 한 문장! 이 안에 사실은 장편소설 하나를 쓰고 남을 분량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한 단어는 그냥 단어가 아니다. 지금 내가 선택한 전화기라는, 눈앞에 보이는 이 물건은 제 뒤에 산더미같은 얘기를 숨기고 저기 시침을 뗴고 놓여있다. 그걸 내가 툭 건드리면 전화기는 저홀로 생명을 얻어 발언하고 상상하고 춤을 춘다. 전화기에 관련된 온갖 기억들이 저홀로 활개치게 내버려둬라.

맨 첫 전화기. 벨이 울릴까 온종일 그앞을 맴돌게 만들던 전화기, 깨어진 전화기, 잊었던 목소리가 난데없이 흘러나오던 전화기, 아무 말도 만들어지지 않던 전화기, 어둠 속에서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번호를 꾹꾹 눌러대던 전화기, 자판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던 전화기........ 내 인생의 온갖 전화기들이 서로 제가 먼저 나오려고 몸부침 치면 서둘다 숨막히지 않게 찬찬히 그걸 조절해주기만 하면 된다.

전화기만 그런 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 다 마찬가지다. 산? 밥? 연필? 어느 것이든 내 삶이 거기 얽혀 벼라별 곡절을 이뤄내지 않은 게 어디 있나. 굳이 곡절만이 글감은 아니다. 곡절 아니라 덤덤한 기억이었더라도 같은 공간에 숨쉬고 살아온 시간 자체가 글감이다. 글쓸 꺼리가 없다는 건 빈 말이다. 자기 삶과 자기 생에 할 말이 하나도 없다고?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고 그런 인생 또한 없다..... 할 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글을 쓰기 싫다고 도망치려는 핑계일 뿐이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은 글을 쉽게 쓰는 요령이 무언지 저절로 알게 됐을 것이다. 바로 할 말이 많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

할 말이 많아진다는 건 그럼 뭔가? 관심이고 호기심이다. 관심과 호기심이 깊으면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면 똑같은 현상 안에서도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들린다.

사과를 한번 그림으로 그려본 사람들은 사과의 빛깔이 단순히 빨강만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노랑과 분홍과 연두빛이 거기 은은히 숨겨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빨강은 빨강만이 아니며 초록과 노랑이 섞여서 빨강이 더 완벽하게 완성되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그런 통찰이 바로 글을 쓰는 맛이고 읽는 맛이다.

요컨대 글을 잘 쓰려면 만사를 유심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면 안보이던 게 보인다. 전에 안 보이던 바로 그것을 기록하는 게 글이다. < 터치 오브 사운드>라는 자연의 모든 소리를 따라가보는 다큐멘타리가 그토록 강렬했던 건 현미경같은 눈으로 세상을 확대해서 들여다 봤기 때문이다. 그런 확대경이 아니면 보이지 않았을 숱한 신비와 매혹들-- 그게 우리 안의 감수성의 떨판을 흔든다 . 그리고 그 흔들림이 바로 글쓸 꺼리 (할 말)다.

그리고 유심히 들여다 볼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다. 자신은 자신이니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다. 중요할 뿐 아니라 세상 유일한 존재이고 뭐니뭐니해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 유일하고 소중한 자신을, 남이라고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켜볼 것, 그런 눈을 뱃속에 하나 마련해두고 수시로 꺼내서 스스로를 점검할 것,그 점검일지가 바로 최상의 글이다. 그리고 어쩌면 글쓰기의 핵심목표는 바로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써라. 그냥 , 무조건 시작부터 해놓고 봐라. 내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잘 안다고 자신하는 것, 그걸로 일단 아주 간단한 첫문장을 만들어놓고 봐라!

46. 수필문단의 현황

홍억선

날마다 쏟아지는 수필집과 작품들을 보면서 바야흐로 수필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실감한다. 한국문협에 속한 수필가들만 해도 2천을 헤아리고, 문예지와 각종 등단 과정을 통해 연간 삼사 백여 명이 넘는 수필가들이 쏟아져 나온다. 예비 작가들을 위한 수필창작 강좌가 각 대학 사회교육원이나 공공도서관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단체에 개설되어 있고 일반인들의 관심과 참여도 또한 뜨겁다.

지난해에는 1억원이라는 상금을 내걸고 수필작품을 공모하는 기업도 있었다. 시와 소설을 비롯한 타 문학 장르가 퇴조하고 있는데 비하여 최근 몇 년 사이에 유독 수필가들의 증가율이 가히 폭발적인 까닭은 무엇일까. 수필문학을 신변잡기니 잡문이니 하여 중심문학으로 대우하는데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문단현실에 비추어 보아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필문학이 타고난 감수성과 전문성을 강요하지 않고 비교적 생활문학에 가까워 누구나 접근이 쉽기 때문일 것이라는 지적에는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오늘날의 수필문학이 그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데는 시대 흐름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정보사회가 도래하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문학 내부에서는 이미 운문의 시대에서 산문의 시대로의 이행이 예견되었다. 돌아보건대 농경사회에서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이 문자를 독점했었다. 사회적 구조가 단순했던 농경 사회에서 문자를 독점한 일부 계층들의 문학적 표현의 대상은 화조월석(花鳥月石)이나, 음풍농월(吟風弄月)에 치중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산업화 이전의 시대는 탄성의 운문 중심시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 구조는 더욱 복잡해지고 전문화 되어갔다. 직업의 종류도 수만 가지를 헤아리게 되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와의 소통을 위해서는 설명과 설득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설명과 설득의 사회에서는 애초에 비유와 상징으로 자아를 감추는 시장르의 퇴조는 필연적이요, 허구를 도구로 삼는 소설 역시 시대에 부합할 수 없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래 전에 율격을 상실한 시 장르가 존립의 탈출구를 산문화에 두어 온 것도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는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더구나 최근 발표되는 소설들의 절반 이상이 수필의 특성을 차용한 1인칭 화자의 사소설이라는 점은 문단의 전반적인 관심이 수필장르로 이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즉 복잡다단한 구조의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로의 시대 흐름이 수필의 바탕을 열어놓은 것이다.

문학은 은유다?

청소년 영화에서 오토바이 질주 장면은 대개 청소년들의 방황이나 격정 등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다. 철수가 방황한다거나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있음을 서술하지 않고 장면화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청중들이 철수의 방황과 격정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감정이나 생각을 직접 서울하지 않고 구체적인 사물이나 장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은유’이다. 모든 문학은 작가의 생각을 직접 서술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은유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은유적 구조를 해석하는 일은 물론 우리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각자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의 과정에서 다양한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 오토바이 질주 장면만 해도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방황, 격정뿐만 아니라 사랑, 반항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해 낼 수 있다.

문학에 사용된 언어나 문학의 전체적인 구조가 은유적이기 때문에 문학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공감을 줄 수 있다.

출처 : [ 전북펜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북위원회
글쓴이 : 전북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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