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지금 여기에/책사랑

[스크랩] 수필강좌 - 수필의 모든 것 8

사랑빛 2014. 11. 18. 15:03

31. 서술과 묘사

제라르 쥬네트의 '서술의 경계선'에서

사전적 의미

* 서술--(어떤 내용을) 차례를 쫒아 말하거나, 적음.

* 묘사--(보고, 들은 것이나, 마음에 느낀 것을) 그림이나, 소설 따위에서 예술적, 객관적으로 재현함, 그려냄.

플라톤에 의하면 말하는 방식에는 모방 그 자체(미메시스)와 단순한 서술(디에게시스)로 나뉜다고 하였다. 미메시스를 완전한 모방이라고 하였고, 디에게시스를 불완전한 모방이라고 하였다. 완전한 모방이라고 하였을 때는 더 이상 모방이 아니고 사물 그 자체이므로 모방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방이라고 할 때는 궁극적으로는 불완전한 모방(서술)뿐이다. 즉 미메시스라고 하면 디에게시스(서술)을 말하는 것이다.(참고--플라톤 예술론에서 미메시스를 예술의 기본으로 주장하였다.)

서술이란 비언어적 사건을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어떤 사건을 언어적으로 표현할 때는 완전한 모방이란 있을 수가 없다. (리얼리즘의 일사일어 원칙이 있을 수가 없다는 뜻도 된다.)

모든 서술이 한편으로는 사실상 매우 다양한 비율로 내적으로 은밀하게 엮어져 있다 할지라도 행위와 사건들의 표상(상징, 관념)을 포함하여 서술행위 그 자체를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술은 대상이나 인물에 대한 표상(오늘날 묘사라고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쉽게 말씀드리면 서술한다는 것은 서술과 묘사를 모두 포함한다는 뜻)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서술과 묘사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배웠지만 사실은 서로가 섞여 있어 서로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예로서 모든 동사는 이미 묘사적 성격을 갖고 있다. 실제로 묘사도 서술 행위와 관계 없이 자유롭게 존재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서술장르에 속하는 문학의 갈래(소설, 서사시, 동화, 등등)에서는 묘사란 서술의 보조적 역할을 하면서도, 공간적으로는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다.(산문에서는 묘사가 가장 큰 부분이다 라는 말입니다.)따라서 묘사적 장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묘사가 가지는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어느 정도 장식적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문장이 심미적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설명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장식적 기능이란 바로 심미적이다.

그러나 사실주의 작가들에 의해서 묘사란 설명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고, 이야기의 내용을 상징하는 기법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장식적인 기능을 의미심장한 묘사로 대치시키므로 서술의 영역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제는 서술과 묘사의 차이를 내용의 차이에서 구하고 있다.

서술행위라고 하면 순수하게 과정으로 여겨지는 행위 또는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시간적이고, 극적인 모습(스토리=이야기)을 강조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묘사는 시간의 흐름을 멈추어 놓고 공간 속에서만 서술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묘사는 과정 자체를 광경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표현 방식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서술과 묘사는 언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작업이다. 따라서 서술과 묘사를 구분하기가 불분명하다.

32. 지나친 소재주의와 수필의 품위문제

김우종

한국의 수필에서 자주 나타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지나친 소재주의이다. 즉, 지나치게 재미있는 소재에 집착하려는 것이다. 물론 재미있는 소재를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소설가도 재미있는 소설을 위해서 재미있는 소재를 찾고 있으며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수필가는 허구가 아닌 실제적 삶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또 마땅히 그같은 소재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재미있는 소재에만 집착하면 수필이 지닌 품위를 잃기 쉽다. 어떤 이는 희귀한 사건의 화제거리를 찾고, 어떤 이는 대학생들의 은어나 특정 계층의 속어 비어 등을 소개하는 정도로 수필을 만든다. 한국의 TV개그 프로를 보는 정도의 재미일 뿐 가슴속에 파고드는 문학적 감동이 없는 것이다. 소재가 소재 자체로 끝난 것은 멍멍개로 멍멍탕을 만들기 전에 멍멍개를 그냥 식탁에 올려놓은 것과 꼭 같은 실수다. 수설에 비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기 어려운 수필의 단점을 그같은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오직 수필의 타락일 뿐이다.

수필은 결코 소설가들이 만들어 내는 온갖 이야기의 재미와 경쟁할 필요가 없다.

"그거야말로 수필감이 되겠네요."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재미있는 경험담이 곧 좋은 수필의 소재라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소재에 집착하는 습성이 결국은 수필의 품위를 격하시키고 마는 것이다. 만일 그같은 소재의 흥미로 인해서 최근 젊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삼류 소설가로 전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수필은 현실 자체로서의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대개는 <나> 또는 <우리>를 관찰자로 한 남의 이야기다. 이같은 <실재성>과 <나> 또는 <우리>라는 관찰자의 제한성으로 인해서 수필의 소재는 본질적으로 소설 만큼 흥미로울 수는 없다. 특히 <나>의 신변적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대다수의 경우는 그 소재가 평범할 수 밖에 없다. 매일 춘향이처럼 연애나 하고 볼기를 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더구나 그 소재는 때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정물이다. 돌, 나무, 차 한잔, 풀잎, 찬 이슬이 맺힌 낙엽 등 모두 정물이다. 그리고 이것을 관찰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수필들. 수필문학의 장점은 오히려 여기서 찾아야 된다. 그리고 돌 한 개 나뭇잎 하나로는 소설가들이 아무 짓도 못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주옥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수필가다. 그리고 만일 이런 수필을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안 읽힌다고 해서 그 수필의 본질과 특성을 배반해가며 대중독자의 비위를 맞출 만큼 천박해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만 우리는 이같은 문제를 떠나서 보더라도 역시 적지 않은 수필이 너무 쉽게 쓰여지고 문학적 감동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문학이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상상력의 세계다.

33. 일상인의 문학

문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특별하고 유별나 보이더라도 문학은 우리 일상인들과 함께 살았고 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일상인들더러 듣고 얘기하자고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라는 사람도 일하고 웃고 떠들고 마시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드는 그저 일상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따라서, 문학은 일상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동차가 자동차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야구를 야구 선수들만이 즐기는 것이 아니듯이, 문학은 문학 연구가나 작가들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문학이다.

어머니가 구연하는 실감나는 동화는 이야기이자 한 편의 연극이며, 어머니와 함께 하는 말놀이는 한 편의 시에 가깝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문학의 세례 속에 산다고도 할 수 있다. 동화나 말놀이 등은 문학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들을 간직한 표현들인데, 소실이니 희곡이니 시니 하는 문학의 양식은 이러한 본질적인 속성들을 보다 확장하여 체계적으로 구조화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문학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도 말자. 문학이 정교하게 짜여진 언어 구조물이라 해도, 그 언어라는 것이 별나라의 것인가. 우리가 늘 쓰고 있는 바로 그 말이고 그 말본새 그대로다. 문학이라고 해서 무슨 기상천외의 별다른 언어로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 따름이다. 우리의 말로 문학을 하는데 일상인이 이해하지 못할 문학이 있을 리 없고 일상인이 창조해 내지 못할 문학 또한 따로 있을 수 없다.

문학할 사람을 하늘이 따로 점지했을 까닭이 없듯이, 문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낸 사람도 있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전문가는 물론 있다. 그 방면을 골똘히 생각하고 오래 그 일에 종사한 사람들이므로 전문가의 능력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동차를 만들고 고치는 전문가가 있다고 해서 자동차가 그들만의 것은 아니듯이, 문학이 재능을 가진 전문가들만의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내가 어떻게 문학을?' 하고 겁먹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세 살 짜리에게도 그들의 철학이 있듯이 세 살 짜리의 문학도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나름대로의 인식과 정서를 그 나름의 언어로 구조화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문학을 해서 옷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고 또 입에 올려도 봤을 말이다. 문학이야말로 참으로 무용지물이라고 천박한 실용주의자들은 이 점을 부각시켜 강조한다.

우리가 살아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만나 볼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 삶을 다 살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문학은 그 모든 삶을 두루 체험하게 한다. 살아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를 다 사랑할 수는 없지만 문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수학 공부가 우리에게 두뇌의 회전을 가르치듯이 문학은 우리에게 삶을 설계하는 방식을 알려 준다. 그래서 문학은 역사요 철학이다. 이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옷이며 말이다.

그러나 그 길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사를 간 집에 아름다운 튤립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이듬해에도 튤립은 피어 주었다. 그러나 꽃의 예쁘기며 수효가 전만 못했다. 해가 거듭할수록 그것이 더 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튤립은 꽃이 지고 난 다음 뿌리를 파내어 두었다가 가을에 다시 심어야 꽃이 좋고 포기가 실해진다는 거였다. 그렇게 했더니 과연 그러했다. 꽃나무 하나를 가꾸는 데도 이만한 품이 들거늘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일이 어찌 거저 될 까닭이 있으랴.

그러나 그것이 또 무슨 비법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느 인디언의 얘기가 이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날씨를 신통하게 알아맞히는 인디언이 있었다. 날마다 그의 집 앞에 깃발을 달아서 사람들에게 그걸 알렸다. 맑음은 푸른색, 흐림은 회색.......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집 앞에 깃발이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달려가 웬일인가 물었다. 그러자 그 신통력을 가졌다는 인디언의 말, "음, 내 라디오에 전지가 닳아서 일기 예보를 못 들어서 말아......." 일기 예보를 들어야 날씨를 알 듯이, 문학도 읽어서 아는 것이지 더 무슨 비법이 있겠는가 하면 된다.

읽는 이나 쓰는 이나 문학에 관한 한은 이것이 진리고 이 이상의 비법은 없다. 저 낮고 낮아 보이는 일상의 삶을 글로 체험하고, 그래서 알게 되고, 알아서 길을 잡게 되는 것이 문학이다. 낮은 데에서 출발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길이라는 말이다.

어떤 것을 써야 값지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쓸 만하다고 여기는 것을 쓰면 그만이다. 문학은 일상인의 것이므로 일상인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쓰고 또 그런 사람이 읽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창세 이래로 그것이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34. 자기의 발견

부부가 아닌 남녀가 한 방에서 잘 수밖에 없는 사정이 되었다. 여자가 성경책을 꺼내 놓으면서 제안 겸 경고를 했다. "만약 밤중에 이 성경책을 넘어오면 짐승이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잠이 들었고, 정말 아무 일이 없이 날이 밝았다. 잠을 깬 여자는 방을 나가면서 내뱉는 말, "짐승만도 못한 인간!"

멋대로 해석해도 좋다. 그렇지만 이 얘기 속에는 인간의 내밀한 욕구에 대한 시사가 암호처럼 깃들여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는 아무런 교훈을 주지 않는다 해도 좋고, 그저 지나가는 저잣거리의 우스갯소리 정도로 여겨도 상관없다.

그러나 우리의 화제와 관련해서, 언어는 어떤 것이든지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흔히 우리는 정보적인 언어라고 하면, 신문에 나는 사건 기사거나 증권 시세의 변동 같은 것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거기에는 정보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정보는 표피적이고, 따라서 일차적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이별할 수 없다는 일차적 정보를 전하기도 하지만, 정말 사랑에 흠씬 빠져든 사람이어서, 죽는 한이 있어도 있을 수 없는 이별을 떠올리면서 오늘의 사랑이 주는 행복을 확인하고 반추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문학이 주는 정보는 비밀 정보다.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정보는 대개 인간의 본질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을 발견하게 해 주는 기능을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무대는 한 그루의 고목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시골길,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만이 일관되어 흐르는 단조로운 극의 분위기, 사내아이가 등장해서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목을 매려고 하다가 실패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마지막 대사.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을 매자. (잠시 사이) 고도가 오지 않으면.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사이)……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음, 가자…….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광대한 혼돈 속에서 명백한 것은 단 하나, 즉 우리들의 고도가 오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이다."라고 블라디미르가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그 고도가 오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혀졌는데 죽지 못하고 다시 기다리는 일, 가자고 하면서 가지 않는 행위,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을 함의하고 있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빚어내는 모순은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에서도 나타난다.

벙어리긴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아다다도 사랑받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자기를 아내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전 남편이 돈이 생기자 모질게 학대하는 것을 체험했었기에, 자기를 사랑해 주는 수롱이와 함께 신미도라는 섬으로 몰래 도망을 하지만, 수롱이의 수중에 돈이 모이자 두려움에 떨게 된다.

결국 아다다는 돈을 강물에 뿌려 버리고 그것을 목격한 수롱은 아다다를 물에 빠뜨려 죽이게 된다.

잘 살고자 하던 아다다의 욕망은 어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문학이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것은 결국 인간의 본질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35. 가치의 창조

'로맨스와 스캔들의 차이는?'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아마 그럴싸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싸하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 같은 남녀간의 사랑이라도 보는 입장에 따라서 다른 이름의 붙는다는 점에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달라지는가? 그것은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한 사건을 두고 여당과 야당이 전혀 다른 해석을 한다든가, 신문마다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도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집안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부부 사이에 혹은 부모 자식 사이에 주인공에 대한 평가가 대립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도 관점의 차이 때문이고, 아주 사소한 일로 친구 사이에 견해차가 생겨 우정에 금이 가는 일이 생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소설화한 작품으로 춘원의 '단종 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이 있다.

이 두 작품은 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쓴 소설이지만 내용은 큰 차이가 있다. 무엇 때문인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문학이란 이처럼 세상 만사를 '제 눈의 안경'으로 새로이 바라보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말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이 '아무렇게나 바라보더라도 새롭기만 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새롭되 '참됨'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그럴 듯함'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문학은 세상 만사가 지닌 진리를 찾는 일'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문학의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말을 써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어려운 용어는 몰라도 그만이다. 문학의 새로움과 진리성은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으로 족하다.

삼라만상이 다양한 뜻을 지녔더라도 그것이 왜 모두에게 다 같이 드러나 보이지 않고 사람마다 달리 보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미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관점은 왜 달라지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마다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경험 세계가 다르다고 하거나 상상력의 차이라고 하기도 한다. 혹은 세계관의 차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용어는 각기 다르고 설명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지만, 결국은 한 뜻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이 다른데 그 생각의 다름은 사는 것이 다른 데서 비롯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상이몽(同床異夢)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삼라만상의 숨겨진 의미를 찾고 진리를 찾는 일이다.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글쓰는 연습보다도 바르고 풍성한 삶을 지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 이래서 가능하다. 그래야만 같은 세상을 살고 동일한 삼라만상을 보면서도 여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리를 찾아내는 동상이몽(同床異夢)과 같은 깨달음이 가능하다.

36. 즐거움의 향유

옛날에 결혼을 해서 신방을 차린 사람들은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첫날밤의 신방을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창구멍을 뚫어대기 때문이었다. 왜 보는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왜 재미있는가? 남의 일을 보는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연극이나 문학이 이런 재미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남의 불행을 보는 것도 그것이 구경인 한 재미있고, 남의 성공을 보는 것도 같은 이치로 재미가 있다.

문학도 한가지다. 남의 일을 엿보는 것이 재미있다는 그 원리에 의해서 문학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공부 시간에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영화 구경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이 더러 계셨다. 영화를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영화의 내용을 다시 이야기로 해 주는 것인데도 여전히 재미가 있었다. 이것도 남이 사는 얘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고 창구멍으로 엿보는 심리와 다를 바가 없다.

영화가 됐건 연극이 됐건 혹은 문학이 됐건 그 이야기야 뭐 대단한가? 애정물이라면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하고, 시련에 부딪치고, 그리고는 이별하거나 결합하거나 한다. 서부극이라면, 한 사람이 악한과 충돌하고 그리고 이긴다. 이게 전부다. 그러나 우리는 생선을 먹되 그 가시를 먹지 않고 살을 먹는 것처럼, 어찌어찌 해서 어찌어찌 되는가를 궁금해한다. 운동 경기 중계 방송을 열심히 보는 것이 그런 궁금증에 기대에 있듯이, 문학도 또한 그런 궁금증에 기반을 둔 재미를 모태로 한다. 운동 경기야 이기든 지든 결판이 나도록 되어 있는 거니까 스코어가 어떻게 되었는가만 알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코어보다도 그 과정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손에 땀을 쥔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창구멍으로 신방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구경하듯 남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은밀하게 보는 재미를 즐기는 것이다.

'드봉 쓰봉 따봉'이라는 말이 있다. '소피 마르소가 바지를 입은 모습이 멋있다.'의 번역어란다. 듣고 나면 쉬워도, 6자로 표현해 보라고 할 때 결코 쉬울 리 없고, 또 이해는 쉽지만 그 과정을 설명하는 일도 용이하지 않다. 우선 '소피 마르소'와 드봉 화장품의 관계가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쓰봉이 바지를 가리킨다는 점이 이해되어야한다. 그리고 '따봉'의 출처도 밝혀져야 한다. 이 짤막한 한 마디에 상업 광고의 영향이 어느 정도로 깊이 개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할 것이고, 최소한 3개 국어의 실력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도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중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어쨌건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드봉 쓰봉 따봉'이 주는 재미의 가장 두드러진 연원은 무엇인가? 아마도 '-봉'이 되풀이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사실, 애당초는 전혀 무관한 세 마디의 말이었다. 각기 국적이 다른 말이라는 점이 그것을 알려 준다. 그런데 한 마디의 말로 묶어 놓고 보니 듣기에 그럴 듯하다. '-봉 -봉 -봉' 하고 같은 소리가 되풀이되는 데서 오는 쾌감이 있다. 좀 유식하게 말한다면, '어지러운 삼라만상'에서 본디 무관했던 것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이룩해 놓았다. 더 어렵게 말한다면 '유기성의 구축'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설명을 몰라도 좋다. 그런 용어를 몰라도 이런 '말놀이'가 즐겁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오늘도 노래한다. '리 리 릿자로 끝나는 말은 개나리 보따리 대사리 소쿠리 유리 항아리' - 한 편의 노래 가사가 이렇다. 아무리 봐도 재미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라고 할 게 없다.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을 가진 노래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보다. 그 사람은 인간의 말이란 모름지기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가련한 모습을 보여 줄 따름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인생은 '일'만 하면서 살아야지 '놀이'는 불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인간이 그럴 수 있으랴. 인간의 삶은 일과 놀이의 교직(交織)이다.

37. 현실의 비판

어른들의 세계에 이런 일도 있다. 요즘은 그런지는 몰라도, 욕을 잘해서 손님을 끄는 술집이 더러 있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술은 무슨 술을 더 마셔? 술 많이 마셔서 잘된 사람 봤어? 그만저만 처먹고 얼른 가서 마누라 궁둥이나 만져 줘!" 이런 식이다. 욕을 이렇듯이 독하게 먹으면 기분이 나빠야 할 터이나 어찌 된 셈인지 손님은 점점 늘어만 간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왕왕 있었다.

왜 그런가? 사람에게 본시 학대받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서 그렇다는 설명도 한다.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우는 재미'와 관련해서 생각해보자. 눈물을 펑펑 쏟는 영화를 보려고 암표를 사면서까지 몰려든 놈습과 욕을 먹기 위해서 술집에 가는 것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을 법하지 아니한가. 그렇다, 우는 재미와 욕먹는 재미는 그 근원이 같다. 울고 나니 시원하다든가 욕을 먹고 나니 후련하다든가 하는 것은 나중 얘기고, 그것이 우리 삶에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는 한도에서 우성 재미가 있다.

그 재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인간은 신과 악마의 중간에 있는 존재라고도 하고 그 양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야누스같은 존재라고도 한다. 그 어느 쪽이 더 인간다운가 하는 것은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중세까지의 지구 위에서는, 악마의 본능을 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악마의 짓이라고 생각했고, 그러기에 보통보다는 비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문학에서 해야 되는 것으로 알았다. 신과 비범한 사람은 다른 것이지만 인간은 그 비범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부 활극의 존 웨인이나 람보 같은 인물도 그런 비범성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고전적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그런 일은 쉽지가 않고 인간적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오늘 우리의 삶은 비범해지기보다는 평범해지기를 요구한다. 영웅의 소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영화에서 그런 비범한 역할은 로보캅 같은 기계나 터미네이터 같은 인조인간이 맡게 된다. 이런 생각은 리얼리즘과 끈이 이어져 있다. 인간은 누구나 평범하고 또 삶은 고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인간의 참된 인간성은 그 자잘하고 괴로운 삶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다. 신들의 이야기가 신화요, 영웅들의 이야기가 고전의 세계라면, 인간의 이야기는 근대 문학의 세계다. 프라이(N. Frye)같은 학자는 문학사를 그것으로 구획지을 수 이TEk고 g마녀서 신화, 로망스, 아이러니 등의 명칭을 붙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문학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나 알면되고, 우리는 근대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곤궁하고 괴로운 모습을 그리는 데로 옮겨 온 시대라고 알면 족하다.

수녀원 이야기는 신과 악마의 사이에 있는 인간의 못브을 함축하기 때문에 우스갯 소리의 소재가 많이 되어 왔다. 그것은 특정 종교에 대한 가치 판단과도 무관하다. 이런 얘기는 어떤가? 수녀원에 갓 들어온 젊은 수녀 하나가 수녀원장을 찾아와 호소한다. 밤이 괴롭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지 않으려고 해도 남자 생각이 간절하니 원장님께서 이를 물리칠 길을 인도해 달라는 간청이다. 수녀원장은 피스톨(pistol)을 하나 준다. 밤에 남자 생각이 나거든 거울 앞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권총 실탄을 발사하라는 것이었다. 젊은 수녀는 그대로 했다. 권총 소리에 놀라면서 밤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 주일만에 권총 실탄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실탄을 얻으려고 원장의 방문을 열었더니만, 자 주목하시라, 수녀원장은 거울 앞에 서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지닌 재미의 요체는 성적인 은밀함과 관련된어 있다. 그러나 그 점을 논외로 하고 생각해 보면 리얼리즘의 맥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인간은 본시 약하고 괴로운 존재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런 것을 인간적이라고 한다. 욕쟁이 할머니에게서 욕을 듣고 후련하듯이, 인간의 연약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볼 때 인간은 인간적 친밀감과 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기미를 이해하게 되면 나도향(羅稻香)의 '벙어리 삼룡이'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는 건넌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색시는 없었다. 다시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또 없고 새서방이 그의 팔에 매달리어 구원하기를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뿌리쳤다. 다시 세까래가 불이 시뻘겋게 타면서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부엌으로 가 보았다. 거기서 나오다가 문설주가 떨어지며 왼팔이 부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몰랐다. 광으로 가 보았다.

그는 다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야 그는 색시가 타 죽으려고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색시를 안았다. 그리고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나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로소 자기의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이 자기의 가슴에 느껴지는 것을 알았다. 색시를 자기 가슴에 안았을 때 그는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하였다. 그가 자기의 목숨이 다한 줄 알고, 그 색시를 내려놓았을 때는 그는 벌써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애써 읽는 심리가 리얼리즘을 낳는다. 그것은 우리가 공동 운명체라는 연민어린 자각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하찮은 오해가 갈등을 일으키고 끝내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몰아가는 일은 현실 속에 수없이 많다. 그것을 함께 깨달으면서 살자고 리얼리즘은 부르짖는다. 그러기에 리얼리즘이 현실 고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됨은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 아닌가.

현진건(玄鎭健)의 '운수 좋은 날'이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서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차리면 족하다

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남편은 아내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마로 까치집 같은 환자의 머리를 꺼둘어 흔들며,

"이 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보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차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천정만 보느냐, 응?"

하는 말 끝에 목이 메었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의 똥 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을 어릉어릉 적시었다. 문득 김 첨지는 미칠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부터가 벌써 이죽거리는 투가 역력하다. 그것은 실은 '운수가 몹시 나쁜 날'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 삶이 지닌 양면성과도 관계가 있다. 기쁨이 슬픔도 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슬픔과 기쁨은 손등과 손바닥처럼 하나인 것이 우리 삶이다.

38.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

문학은 거짓말의 세계다. 거짓말의 세계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는 말이다. 이렇게 가상의 세계, 허구의 세계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짓말의 세계를 애써 읽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거짓 세계를 즐겨 여행하다 보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무엇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또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넓혀 준다는 것이다.

가령 인간이 모순 덩어리라는 사실 역시 문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미 인간이 모순의 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그 모순성을 더욱 절실히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한용운의 '논개(論介)의 애인(愛人)이 되어서 그의 묘(廟)에' 라는 시를 보기로 하자. 이 시는 제목도 길거니와 시도 길어서 다 인용하기 어려우므로 앞부분만 떼어서 여기 소개한다.

날과 밤으로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論介)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에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이 시는 거짓말 투성이다. 흐르는 남강이 가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하고.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가 달음질친다는 등···. 그러나 찬찬히 읽어 보면 말이 되는 거짓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특히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준다.'는 부분에 이르면 그것이 그럴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럴 수 있음이 다 사람의 일이라서 그러한 것을 알게되고, 사람의 일이 그렇다는 말은 인간이 모순 된 존재라는 데서 오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마치 몇 십년 만에 만난 이산 가족이 함박웃음을 짓는 대신에 통곡을 하는 것과 같다. 문학은 거짓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이런 어처구니 없는 모순성을 이해하게 해 준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행동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은데, 인간의 모순덩어리인 모습도 어린아이에게서 쉽사리 발견된다. 그 일례로, 어린아이가 낯선 사람을 보게 되면 우는 경우가 많다. 엄마 등에 업혀 있으면서도 귀엽다고 쓰다듬어 주는 어른이 낯이 설다고 얼굴을 파묻고 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자. 우는 어린아이는 얼굴을 파묻고 울다가도 다시 그 낯선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서럽게 운다. 그러고는 다시 또 바라보고 울고, 또 바라보고 울고···. 참 이상한 노릇이다. 그 얼굴이 무서우면 다시 돌아보지 않으면 될 일을 아이는 연신 돌아보면서 새록새록 무서워서 운다. 이것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그렇다.

병의 증세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서 정확한 진단을 위해 입원한 환자는 자신의 병이 혹시 암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마련이다. 다른 병이면 몰라도 암이 현재로서는 불치의 병이기 때문에, 아닐 것이라는 희망과 그럴 것이라는 의심을 함께 지니게 마련이다.

암이 아닐 수 있는 여러 가지 심증을 자신의 속으로 꼽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할 것 없이 암이라는 여러 심증도 동시에 마련하고는 속을 끓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창과 방패를 동시에 지닌다. 병이 정말로 암이어서 '암이요!'하고 일러 주면 십중팔구는 그 말 한마디로 이미 죽음의 문턱에 가 버린다. 확실하게 알려 주어야 투병을 할 거 아니냐고 주장하던 말과는 전혀 다르다. 이래서 그런 환자에게는 끝까지 "암은 분명 아니다."라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때 그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희망의 언어가 된다. '아닐 것이다.'와 '그럴 것이다.'의 공존. 앎이 희망이자 동시에 절망인 모습,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순 된 본질이다.

암 얘기가 너무 무겁고 침울하다면 산뜻한 연애 얘기로 바꾸어도 좋다. 소개팅으로 옆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혹은 남학생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학생이 좋아지면 곧 불안한 생각을 하게 된다. 만날 날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선생님이 눈치챌까봐 조마조마하고, 그 땐 대학생이 되어 자유롭게 만날 날만을 꿈꾼다. 그런데 정작 이런 커플들이 대학생이 되면? 대개의 커플들이 반 년 이내에 헤어진다고 한다. 원하던 조건이 갖춰졌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지 않고 오히려 불안했던 과거가 더 행복한 시기였다고 추억하는 인간의 모순. 이러한 모순은 왜 생기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본질이 모순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며, 그런 인간의 본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나 혹은 너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며 어떤 고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독자 스스로 발견하게 해 준다.

문학의 효용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도와 주는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와 주기도 한다. 또는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보여 주기도 한다. 간접 체험이라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 간접 체험의 중요성 내지 필요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경험의 한계를 얘기하고 넘어가야 할 듯 하다. 인간이 백 년동안 경험할 수 있는 것의 양이 얼마나 될까?

살아가면서 동일한 상황이 똑같이 반복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 경험의 양은 적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날이 새로운 경험을 하고 동일한 사물도 새롭게 인식한다고는 하지만, 그 경험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경험할 세계의 폭이 어느 정도 결정되는 셈이다. 21세기의 오늘날 한국에서 둘째딸로 태어난 사람이 경험할 일들과 15세기 영국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 경험했을 것들이 다를 것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다른 시대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 너무 현실감 없다면 비교의 범위를 좀더 좁혀 보자.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온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같은 학년의 학생이기는 하지만, 시골 태생 친구와 도시 태생의 친구의 경험이나 생각이 같을리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세상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갈등 또한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말 소통에 자신 있는 사람조차도 옆 사람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때가 있고, 친구의 말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때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 다툼까지 일어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살아 왔고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언뜻 학교 교육이나 봉사 활동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렇지만, 여기서는 문학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려 한다.

'함께 살기', 즉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은 다른 사람(他人)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문학은 자신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타인에 대한 이해를 도와 준다. 문학 작품 안에는 한 인간의 내밀한 감정이 들어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 노출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감정과 갈등에 공감할 수 있다. 남성이 여성 주인공에게, 또는 그 반대로, 현대인이 15세기 주인공에게, 동양인이 서양의 주인공에게, 자식이 부모역을 하는 중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이다. 이런 감정 이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을 즐겨 읽는 사이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넗힐 수 있게 된다.

39. 참여의 즐거움

사람에게는 말을 하고 듣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본능이 있음이 분명하다. 수업 시간이 좀 지루해진다 싶으면 남자 선생님들은 툭하면 "내 군대 있을 때 말씀 야···"로 말을 꺼내기를 좋아한다. 또 여자 선생님들은 지난 밤에 TV 연속극 이야기를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꺼낸다. 학생들도 이미 다 들었거나 보았던 이야기이지만 또 들어도 재미있다. 새로 부임하시는 선생님들께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허구헌날 졸라대지 않았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사람이야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은밀한 기쁨 때문에 대숲에 대고 그 소리를 질렀다고나 하지만, 비밀도 아니고 남 다 아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헤대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말 엮는 본능이 짐작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입이 무거워서 말을 참는 사람이 더러 있다. 남들이 군대 얘기며 첫사랑 얘기로, 또 남들 다 보는 드라마 얘기로 꽃을 피울 때 묵묵히 듣기만 하면서 미소나 짓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볼 때면 인간의 말하는 즐거움 추구가 모두에게 보편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이다. 그토록 입이 무겁던 사람이 일단 한 번 발동만 걸려 봐라. "내 말 알아들어?"를 거듭 거듭 되풀이하면서 한 말을 또 하고 다시 또하고 해서 사람을 지치게 만들 것이다.

더군다나 아빠들의 경우 약주라도 한 잔 하셨다면 이야기는 끝이 없다. 평소에는 그토록 억제했던 것이라도 술에 취해서 사람들의 입이 가벼워져서 "숲에 든 꿩은 개가 내몰고, 오장 속에 든 말은 술이 내몬다."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니까, 역시 성격의 차이가 있을 뿐, 말을 하는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기에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이야기를 세 시간, 네 시간도 넘게 할 수 있는 힘이 여기서 솟아나기도 한다.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본능과, 하되 즐기면서 하기 위한 재미를 추구하는 결과다.

따지고 보면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 주고픈 본능이 그 즐거움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염상섭(廉想涉)의 저 유명한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첫머리만 보더라도 그런 성격은 분명해진다.

내가 중학교 2년 시대에 박물 실험실에서 수염 텁석부리 선생이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가지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 차례차례로 끌어내서 자는 아기 누이듯이 주정병에 채운 후 옹위하고 서서 있는 생도들을 돌아보며 대발견이나 한 듯이,

" 자, 여러분. 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시오."

하고 뾰족한 바늘 끝으로 여기저기를 콕콕 찌르는 대로 오장을 빼앗긴 개구리는 진저리를 치며 사지에 못박힌 채 벌덕벌떡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8년이나 된 그 인상이 요사이 새삼스럽게 생각이 나서 아무리 잊어버리려고 애를 써도 아니 되었다. 새파란 메스, 닭의 똥만한 오물오물하는 심장과 폐, 바늘끝, 조그만 전율···. 차례차례로 생각날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쭈뼛하고 전신에 냉수를 끼얹는 것 같았다.

남향한 유리창 밑에서 번쩍 쳐드는 '메스'의 강렬한 반사광이 안공을 찌르는 것 같아 컴컴한 방 속에 드러누웠어도 꼭 감은 눈썹 밑이 부시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머리맡에 놓인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둔 면도칼이 조심이 되어서 못 견디었다.

개구리의 내장에서 더운 김이 나느냐 나지 않느냐로 시비가 붙기도 했던 대목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와 무관하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야기'를 즐기고 있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의 자기와 기억 속의 모습을 짝지어 가면서 이야기는 엮어진다. 개구리 해부 시간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것이 현재의 상황과 짝을 이룸으로써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틀이 갖춰진 셈이다.

생물 시간에 일어난 이야기가 이렇듯 심각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학교의 중간 고사 생물 시험 문제이다. 괄호 넣기 문제였다고 한다.

(문제)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곤충은 머리, 가슴, ( )로 나뉘어져 있다.

답은 물론 '배'였다. 대부분의 학생이 '배'라고 정확히 썼다고 한다. 쭉 일사천리로 채점을 해 나가다가 한 학생이 써 낸 답을 보고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배꼽을 쥐고 웃었다. 답인즉슨,

"곤충은 머리, 가슴(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학생은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하며 답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해 듣는 우리는 포복 절도하게 된다. 설마 이렇게 답을 쓴 학생이 있겠느냐고 묻지 말자.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토록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고 있는 시험이라는 공포 상황에서 벌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음 문제도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역시 괄호 넣기 문제이다.

(문제) 개미를 세 등분으로 나누면 ( ), ( ), ( ).

물론 머리, 가슴, 배가 정답이다. 근데 이 문제의 학생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심각하게 답을 한다.

"개미는 세 등분으로 나누면 (죽), (는), (다)!!"

시험장에서 겪은 이 학생의 심각함이 우리에게 웃음의 감동을 주는 것이나. 김동인이 어느 강가에서 들은 노래 소리를 듣고 써 내려간 "배따라기"가 주는 감동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 작품은 대동강 모란봉에서 들려 오는 노래 "배따라기"의 임자를 찾아 그의 노래에 얽힌 사연을 듣는 것으로 화두를 삼고 있다.

그는 '배따라기'의 맨 마지막, 여기를 부른다.

밥을 빌어서 죽을 쑬지라도

제발 덕분에 뱃놈 노릇은 하지 말아

애야 - 어그여 지여 -

그의 소리로써 방향을 찾으려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섰다.

이런 과정을 통해 드디어 그 노래의 임자를 만나고, 그의 한숨을 발견하고, 운명의 힘과 삭이지 못할 원한의 느낌을 전해 받은 다음 그의 사연을 청해 듣는데, "십구 년 전 팔월 열하룻날 일인데요···. "를 경계로 이야기는 서술자의 입으로 옮겨 간다.

그렇다면 이 소설 '배따라기'는 무엇인가? '배따라기'야 서도 민요 가운데 하나로 '이선악(離船樂)이라고도 불리는 노래다. 그것을 부르고 들은 사람을 어찌 수로 헤아릴 수 있으랴? 서도 가락의 애잔함에 담긴 그 노래의 정서를 느낀 사람도 한둘일 것인가?

그러나 김동인은 그 익숙한 '배따라기'의 틀에 들어서면서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배따라기의 사연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제 말놀이가 왜 즐거운지에 대한 해명도 끝이 난 셈이다. 그것이 문학의 길이라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는 일도 끝낼 때가 되었다. 문학이란 것이 어느 특정한 작가들만의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물려받아 생활로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틀 속에 자기를 얽매여 두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릴 때 그 기쁨은 희열의 경지로 발전한다. 자잘한 말놀이로부터 수수께끼의 정신이 다 그러하며 그것이 바로 문학으로 향하는 길목임을 알아차렸으니, 문학쯤이야 무엇이 두려우랴. 오직 즐거움이 있을 따름이다.

모든 문학이 다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나 그 기본 원리는 이야기를 엮어가는 재미에 터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고, 그것은 군대 얘기며 첫사랑 얘기처럼 말하는 즐거움의 추구이며, 수다에 취하면 같은 말을 다시 또 다시 되풀이하는 본능의 발로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문학이 어찌 즐거운 놀이가 아닐 수 있겠는가.

문학이 이처럼 즐거운 놀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우리 역시 이야기 더 나아가 문학 작품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40.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윤오영

옛 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형태 없기로 난(蘭)을 그렸던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의 빙옥(氷玉)같은 심정을 그리려 하되, 형태 없으므로 매화(梅花)를 그렸던 것이다. 붓에 먹을 듬뿍 찍어 한 폭 대(竹)를 그리면, 늠름한 장부, 불굴의 기개가 서릿발 같고, 다시 붓을 바꾸어 한 폭을 그리면 소슬(蕭瑟)한 바람이 상강의 넋을 실어 오는 듯 했다. 갈대를 그리면 가을이 오고, 돌을 그리면 고박(古樸)한 음향이 그윽하니, 신기(神技)가 이니고 무엇인가. 그러기에 예술인 것이다.

종이 위에 그린 풀잎에서 어떻게 향기를 맡으며, 먹으로 그린 들에서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이것이 심안(心眼)이다. 문심(文心)과 문정(文情)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백아(伯牙)가 있고, 또 종자기(鐘子期)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뜻을 알면 글을 쓰고 글을 읽을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讀者)를 저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작자(作者)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時代)의 공민(共悶)이요, 사회(社會)의 공분(公憤)이요, 인생(人生)의 공명(共鳴)인 것이다.

문인(文人)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사(身邊雜事)를 즐겨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片貌)와 생활의 정회(情懷)를 새삼느꼈기 때문이다.

속악(俗惡)한 시정잡사(市井雜事)도 때로는 꺼리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인생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여기서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신은 주관적인 자신이 아니요, 응시(凝視)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잡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情)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모두 다 글이 되는 것이다.

의지가 강렬한 남아는 과묵(寡黙)한 속에 정열이 넘치고,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 하던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 진실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장황(張皇)하고 산만(散漫)할 수 밖에 없다. 사진의부진(辭盡意不盡)의 여운(餘韻)이 여기 있는 것이다.

깊은 못 위에 연꽃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도 바닥에 찬 물과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吟味)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멀 수로 맑은 향기가 은은히 퍼지며, 한 송이 뚜렷한 연꽃이 다시 우아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글이 쓰고 싶고, 이런 글이 읽고 싶다.

출처 : [ 전북펜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북위원회
글쓴이 : 전북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