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지금 여기에/아이의 노래

[스크랩] 우리 동시의 가능성_김제곤

사랑빛 2014. 11. 18. 15:05

우리 동시의 가능성 
  -최근 출간된 네 권의 동시집을 중심으로

김제곤 


 1.
 우리 동시가 침체에 빠져있다는 탄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나 또한 그런 탄식의 소리를 내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동화는 범람을 걱정할 지경인데 동시에 가뭄이 들었느니 하면서 한때 동시의 앞날을 걱정하는 포즈를 취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 스스로에게 우리 동시가 침체에 빠졌다는 인식이 과연 옳은 것이었나 하는 반성적 질문을 하게 된다. 침체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 군데 머물러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바, 과연 우리 동시는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인가.
 동화에 견주어 턱없이 모자라기야 하겠지만, 우선 올해 출간된 동시집이 ‘가뭄’을 운운할 만큼 빈약하지 않다. 순수 개인 창작의 동시집만 살피더라도 20권을 너끈히 헤아린다. 풍문에 의하면 그런 동시집 가운데 독자들에게 유난히 관심을 끌고 있는 시집도 아주 없지는 않은 듯싶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올 한 해 출간된 작품들에서 어떤 침체의 기운이나 위기의 조짐보다 새로운 가능성을 많이 엿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특히『낙지네 개흙잔치』(창비 2004)의 안학수, 『숲의 소리』(샘터, 2005)의 이상권, 『아기까치의 우산』(창비, 2005)의 김미혜, 『말놀이 동시집』(비룡소, 2005)의 최승호는 우리 동시의 발전 가능성을 예측하는 좋은 징후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선 안학수는 우리 동시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갯벌 공간을 시적 공간으로 훌륭히 끌어들이고 있다. 안학수는 균형 잡힌 생태적 관점과 건강한 삶의 태도를 바탕으로 기존의 우리 동시가 보여준 상투적인 말법과 시어를 배제하고 참신한 시어들과 자연스러운 리듬을 구가함으로써 갯벌의 진경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안학수의 표현 방식은 이전의 이문구가 선보인 어법을 잇는 것으로써 그의 동시는 우리 동시가 간과하고 있는 음악성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화성을 온전히 회복하고 있다. 생태동화작가로도 알려진 이상권의 첫 시집 『숲의 소리』는 개성 있는 어린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도입하여 숲속 작은 생물체들과 교감하는 즐거움을 어린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다. 김미혜는 우리 동시가 지녀온 전통에 가장 근접해 있는 시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금 여기 아이들과 소통하는 길을 모색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동시는 짧고 간결한 시형을 고수하면서도 그 속에 요즘 아이들에 친근한 말맛과 아이다운 생기를 함께 담아내고 있어 주목된다. 최승호는 구전동요가 사라지면서 맥이 끊긴 말놀이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유년 아이들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궁리하고 창안해낸 시인이다. 그는 우리 동시에는 없던 진정한 넌센스를 도입함으로써 억지스러운 말장난과 엄숙주의에 길들여진 우리 동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2.
 우리 문학에서 이른바 생태주의적 감수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다. 생태주의적 감수성을 내 식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작고 여린 생명체들에 대하여 시인이 가지는 지극한 사랑의 감정이다. 특히 아동문학에서는 그러한 태도가 두드러진다. 우리 아동문학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작고 여린 목숨들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과잉이 문제였지 결코 결핍이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감상주의 일색이거나 동심주의에 기울어 있었다는 점이다. 안학수 동시는 갯벌에서 살아가는 자연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지만 그러한 사랑의 과잉 태도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우리 동시에서는 생소한 갯벌 생물들에 대해서 노래한다. 그가 그것을 노래하는 까닭은 다만 생소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때문도 아니고 새삼 자연을 사랑하자는 생태주의적 호소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는 고둥, 조개나 칠게, 방게, 갯지렁이나 개불 같은 뭇 생명들이 개흙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펼쳐 보이”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새삼 세상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등을 기댄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에 대해 숙고하도록 한다.
 안학수의 동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바로 문체와 리듬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시에 있어서 문체와 리듬은 단순한 기법이라는 차원을 넘어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주체적 태도나 자세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가늠하는 잣대라 할 수 있다. 문체와 리듬의 차이가 작품의 밀도를 결정을 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학수 동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주목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갯벌을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인 것을 꼽는다. 그러나 그것이 『낙지네 개흙잔치』의 미덕의 전부는 아니다. 사실 갯벌을 시적 공간으로 삼는 것은 모두 6부로 구성되어있는 이 시집에서 1부와 2부에 국한된다. 내가 보기에 안학수 동시가 지닌 미적 자질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아야 할 것은 오히려 어떤 것을 그리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떤 언어와 운율로 그려내고 있는가가 아닐까 한다. 즉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동시들과 안학수의 『낙지네 개흙잔치』가 거두고 있는 시적 성취를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다른 시인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안학수의 초기시와 『낙지네 개흙잔치』를 비교해 보자.  
 주지하다시피 안학수는 『낙지네 개흙잔치』를 내기 전에 『박하사탕 한 봉지』(계몽사, 1997)라는 동시집을 낸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두 시집은 ‘갯벌’을 주된 시적 공간으로 삼는 시들이 여러 편 실려 있다. 거칠게 말해서 두 시집의 ‘무엇을’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두 시집의 질감이 판이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개펄밭에서 개구쟁이 아기황바리/ 엄마 몰래 들고 나온 꽃가위로/
비단 바다 한 조각 잘라 내려다/ 갈매기가 지켜보아 그냥 옵니다.//
갈매기 없는 틈을 숨어 엿보다/ 살금살금 기어서 다가가더니/
쏴르르르 쫓아오는 밀물 소리에/ 깜짝 놀라 잽싸게 집에 듭니다.
                                         -「개펄밭에서」전문

 위 시는 안학수의 첫 번 째 시집『박하사탕 한 봉지』에 수록된 시다. 이 시에는 ‘아기황바리’라는 아기게가 등장한다. 『낙지네 개흙잔치』에 수록된 시들이 주로 고둥, 농게, 짱뚱어, 갯지렁이, 뻘조개 같은 주로 갯벌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란 점에서 두 시집간의 시적 소재는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시의 성공여부를 굳이 따져 물을 때 위 시「개펄밭에서」가 나름의 시적 성취를 거두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말과 리듬의 사용 방식’에서 찾아진다. 가령 이 시가 지니고 있는 7.5조 운율은 우리에게 너무 식상하다. 시에서 엿보이는 형식의 익숙함이란 곧 말과 리듬에 대한 시인의 자각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연에서 보이는 표현 또한 우리 동시가 관습적으로 다루어 온 회화성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가령 아기황바리가 ‘엄마 몰래 들고 나온 꽃가위로/ 비단 바다 한 조각을 잘라내려고 했다’는 표현은 보기에 따라서는 얼마나 피상적이고 관념적인가. 다시 말해 그것은 시인이 발견해낸 독창적인 말하기 방식이라고 보기에 뭔가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하늘을 건너/ 멀고 먼 하룻길에 지친 저녁해
눈부신 나래옷을 벗어 던지고/ 데워진 바닷물에 몸을 담근다.
                                                -「저녁 바다」부분

             달님이 잠깐/ 구름 속에 든 사이/ 누군가가 살그머니/ 별을 따갔다.//
             초롱초롱 열린 별/ 하도 탐나서/ 설익은 것 몇 개/서리한 거다.
                                                  -「불가사리 몇 개」부분
           
 위 시에서는 아쉽게도 아직까지 시인의 독창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독창적인 목소리가 없다는 것은 이 시에서 그려지는 풍경이 시인이 새롭게 포착한 풍경이 아니라 기존의 누군가가 바라본 풍경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동시에는 유독 이런 모방의 흔적과 동어반복의 현상들이 자주 출몰하는 편이다. 안학수의 첫 시집『박하사탕 한 봉지』는 따스하고 긍정적인 눈으로 갯벌 세상과 아이들의 일상을 바라보려 하고 있음에도 아직 안학수 만의 개성이 물씬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집에서의 말하기 방식은 우리 동시가 이미 흔하게 차용한 말법을 크게 뛰어 넘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에 견주어 『낙지네 개흙 잔치』는 동일한 무엇을 그리고 있음에도 그 말하는 방식이 자못 신선한 데가 있다.

뾰록뾰록 뽀루지/ 따개비는 부스럼/ 찌덕지덕 생딱지/ 눌어붙은 굴딱지// 새까맣고 얼룩진/ 울퉁불퉁 못난이// 그래도 그 품에 아기 달랑게를 품었다.// 그래도 그 등에 꼬마 갯강구를 업었다.
                                          -「갯돌」전문

 안학수 본인 말에 따르면 그가 동시를 쓰게 된 계기는 이문구의 동시집 『개구쟁이 산복이』에 자극 받은바 크다고 한다. 그의 첫 시집『박하사탕 한 봉지』의 추천사를 쓴 이도 바로 이문구였다. 그러나 정작 『박하사탕 한 봉지』에는 이문구에게 받은 영향의 흔적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노래의 전통에 기대어 자연 속에 뛰어노는 유년 아이들의 생기를 그려내었던 이문구의 어법이 반영되기 시작하는 것은 오히려 『낙지네 개흙 잔치』에 실린 위와 같은 시들부터가 아닌가 한다. 위 시에는 이른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단순성, 생동감 있는 음악성을 함유한 이문구 식의 말하기 방식을 터득한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오로지 이문구를 답습하는 데만 머무르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이문구의 말하기 방식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자신만의 영역을 다음과 같이 개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릉슬릉 주름진 건/ 파도가 쓸고 간 발자국,/ 고물꼬물 줄을 푼 건/ 고둥이 놀다 간 발자국.//스랑그랑 일궈논 건/ 농게가 일한 발자국,/ 오공조공 꾸준한 건/ 물새가 살핀 발자국//온갖 발자국들이 모여/지나온/ 저마다의 길을 펼쳐 보인 개펄 마당.// 그중에 으뜸인 건/ 쩔부럭 절푸럭/ 뻘배 밀고 간 할머니의 발자국//그걸 보고 흉내낸 건/ 폴라락 쫄라락/ 몸을 밀고 간 짱뚱어의 발자국
                                             -「개펄마당」전문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사물의 형상을 꾸며주는 시늉말들의 참신함이다. 밀릉슬릉, 고물꼬물, 스랑그랑, 오공조공들은 이전 시인들이 동시에 관습적으로 배치하던 그런 시어들과는 차원이 다른 말이다. 그 말들은 시인이 새롭게 만들어 낸 말들이면서 각기 자신이 꾸며주어야 할 사물의 특징을 온전히 함축하고 있다. 사물의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그런 시어들로 인하여 이 시는 이른바 구체적인 회화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 시를 돋보이게 하는 또 하나는 자연스러운 리듬이다. 1, 2연의 ‘~ ㄴ 건’과 ‘발자국’의 규칙적인 반복은 3연에서 한 번 멈추었다가 다시 4, 5연으로 이어진다. 3연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들어 있는 연이면서 1, 2연과 4, 5연 사이의 호흡을 조절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앞의 시들이 기존의 관습에 기대어 안이하고 단조로운 리듬을 차용하는데 머무르고 있다면 이 시에 드러나는 호흡에는 시의 내용에 합치되는 운율을 고르기 위하여 고심한 자취가 뚜렷하다.
 안학수는 자신이 발견한 이런 말하기 방식으로 우리 삶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다. 서두에서 이미 지적한 바 안학수 시가 표방하는 것은 이른바 목숨을 가진 생명들의 존재가치가 모두 평등하다는 인식이다. 다시 반복하거니와 갯벌 마당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온갖 생물들의 발자국이 모여 지나온 저마다의 길을 함께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쩔푸럭 절푸럭 뻘배를 밀고 가는 것처럼 짱뚱어 또한 폴라락 쫄라락 온힘으로 제 몸을 개펄 위로 밀고 간다. ‘살기 위해’ 온몸으로 뻘 위를 밀고 간다는 측면에서 할머니와 짱뚱어는 동격이자 한몸이다. 짱뚱어가 할머니로 할머니가 짱뚱어로 대치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계가 바로 안학수가 독창적으로 발견한 갯벌의 세계이다.  

비단고동네 집에서 석달, / 총알고동네 집에서 열달// 대수리네 집 얻어 한 해,/ 개울타리네 집 얻어 몇 해.// 집 옮기기 이골나고,/ 셋방살이 몸에 배고.// 크고 높은 집 말고라도/ 넓고 멋진 집 아니라도/ 몸만 들어갈 수 있으면/ 더 바라지 않는 집게.
                                          -「집게」부분

강가의 모래 마을/ 엄마에게 가야 하나,/ 바다의 뻘 마을/ 아빠한테 가야 되나?// 강을 보면 엄마 생각, 흙 만지다 멍하다./ 바다 보니 아빠 생각. 하늘 구름 찡하다.// 엄마랑 살면 아빠가 그립고/ 아빠랑 살면 엄마가 보고픈/ 똘챙이 마음을 모르는지/ 함께 살 뜻이 없는 엄마 아빠.
                                     -「꼬마 똘챙이」부분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하여 집을 옮겨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집게의 처지에서 집 없는 우리 이웃의 삶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과 바다에 각각 헤어져 사는 부모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똘챙이의 처지를 보고 헤어진 부모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서있는 아이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학수가 거두고 있는 이런 성취는 단지 두 대상 사이 유사성을 매개로 한 단순한 비유의 방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근저에는 그가 자신의 관점으로 인식하게 된, 쓸쓸하지만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삶이 가로 놓여 있다. 안학수는 자신의 예리한 촉수에 걸려든 그 삶을 끝끝내 외면하지 않고 껴안으려 한다.  

형이나 누나도 없고/ 동생도 사촌도 없다.// 엄마는 딴 아빠랑 가서 없고/ 아빠도 딴 엄마랑 가서 없다.// 할머니는 바빠서 없고/ 할아버진 아파서 없다.// 강아지도 없고/ 놀아주는 동무가 없어/ 매일 혼자 노는 아이다.// 오늘은 비가 와서 좋은 날/ 꾀죄죄한 얼굴로/ 빗물 고인 운동장에 앉아/ 흙장난 물장난에 마냥 즐겁다.// 함부로 버려져 나뒹굴다/ 흙먼지로 뿌옇고/ 흙탕물 범벅인 빈 병 하나/ 아주 좋은 장난감이란다.// 빗물에 뜬 하늘을 퍼담으며/ 서로 통하는 게 있다고/ 모처럼 만나게 된/ 마음에 꼭 드는 동무란다.
                                         -「혼자 노는 아이」전문

 요 근래 우리 아동현실을 이렇게 핍진하게 그려낸 작품을 본 적이 있을까. 이 시에 등장하는 아이와 버려진 빈병의 이미지는 아마도 나의 뇌리에 오래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시에서 이전 시집에서 좀체 드러나지 않던, 시적 대상을 섬세하게 헤아릴 줄 아는 시인의 성숙한 시선을 본다. 이제 안학수는 새롭게 획득한 자기만의 말하기 방식과 이런 시선으로 우리 주변의 사물과 현실 구석구석을 더욱 정밀하게 탐색해 나갈 것이다.  


 3.
 우리 동시의 맹점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속빈 강정’쯤으로 비유되는 화려한 수사(修辭)의 문제이다. 우리 동시인들에게 말을 재단하고 꾸미는 것은 체질화되어 있다시피 한 고질적 문제이다. 이른바 외화성 수사의 체질화는 우리 동시의 외형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정화시키고 협소화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이상권은 동시인이 아니라 소설쓰기에서 출발한 동화작가다. 그는 그러므로 이미 동시인들에게 체질화된 이 겉꾸미기의 폐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존의 동시인들처럼 말을 꾸며 쓰지 않는다. 그는 대신 이미 자신에게 체질화된 이야기 방식에서 동시를 새로 시작한다. 이미 ‘나 있는 길’을 비껴가려 한다는 측면에서 그의 시는 읽는 이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고모할머니네 집에 갔다/ 고모할머니는 반겨 주었지만/ 진돗개 잡종이라는 개는/ 우리만 보면 짖어 댔다// 삼촌이 가서 막대기를 휘둘러도/ 아빠가 돌멩이를 집어 던져도/ 개는 짖어 댔다//고모할머니는 새끼를 낳아서 그렇다고 하였다/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도 짖어댔다// 아빠랑 엄마랑 삼촌이랑 나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나가 보니/ 개집 옆에는 누런 송아지 두 마리가 있었다// 나는 송아지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송아지들아! 너희들은 날마다 잠을 자지 못하겠구나!”/ 송아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개집 옆에 사는 송아지들」전문

 위의 시에서 우선 와 닿는 것은 어린이시의 시적 진술 방법과 흡사한 시인의 말법이다. 어린이시가 지니는 시적 진술의 특징은 투박하지만 진솔한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위의 시도 흡사 그런 어린이시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이상권의 동시는 단순히 어린이시의 어법을 모방한 시에 불과한 것인가?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시인의 실제 자녀로 짐작되는 ‘단후’라는 아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동시의 시적 화자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어린이 시적 화자인바, 시인들이 어린이 시적 화자를 즐겨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 어린 독자들에게 주는 시라는 동시의 특수성을 의식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동시에서는 어린이를 시적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본디 노렸던 소기의 목적을 거두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대개 시인이 설정한 어린이의 목소리는 어린이에 대한 단순 모방에 머물거나 어른의 가성(假聲)을 흉내 내는 데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 동시에 나타나는 유치한 혀짤배기 목소리는 그러한 문제에서 비어져 나온 하나의 현상이다. 그러나 이상권이 설정한 시적 화자는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 있다. 그는 자신이 쓰는 동화에서 구체적 주인공을 설정하듯이 한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지닌 시적 화자를 설정하여 시를 풀어나간다. 동화에서 대개 주인공은 자신의 성격과 위상에 걸맞은 시점과 목소리를 갖추듯 시적 화자로 설정된 ‘단후’는 자신의 태도와 시점에 걸맞은 말법과 목소리를 갖추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한다.  

계곡으로 숲 속으로/ 올라가도 올라가도/ 사람들 뿐// “여기 좋은 자리 있다!”// 어른들이 소리쳤다/ 짐을 풀고 부지런히 돗자리를 폈다// “정말 여기 조용하다!”/ “이야, 명당 자리다!”// 내가 생각해도 조용했다/ 물은 없지만 평평한 바위가 있고/ 떡갈나무들이 햇볕을 가려 주었다// 나는 발라당 돗자리에 누웠다/ 머리맡에서 작은 여치가 뛰어나왔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새들이 부리로 나무를 콕콕 찍어 대는 소리/ 비행기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 파리 소리/ 벌레들 똥 떨어지는 소리/ 바람소리// 숲속은 놀이터처럼 시끄러웠지만/ 어른들은 계속/ “이야, 정말 조용하고 좋다!”/ 그 말만 하였다
                                             -「숲 속」전문
   
 널리 알려진 대로 이상권은 90년대 후반 생태 동화라는 장르에 도전을 하며 많은 도시 어린이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자연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 작가이다. 『풀꽃과 친구가 되었어요』나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들은 그런 그의 노력을 대변해 주는 역작들이다. 시집『숲의 소리』또한 제목에서 연상되듯 시적 화자인 단후가 숲 속 작은 생명체들과 교감하며 목숨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깨닫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단후의 깨우침을 돕는 것은 숲에 가기만 하면 “열 가지도 넘는 꽃과 열 가지도 넘는 나물”을 금방 찾아낼 줄 아는 아버지다. 즉 아버지는 단후에게 일종의 조력자-무엇을 가르치는 어른-로 등장한다. 이런 존재를 시에 끌어 들일 때 시적 화자는 그 존재와 독자를 잇는 단순한 매개자 역할을 하는데 그치기 쉬우며, 시의 내용 또한 일방적인 교훈을 실어 나르는 도구가 되기 쉽다. 이상권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대화체’를 선택한다. 시적 화자는 어른이 내려주는 교훈을 일방적으로 전수받는 존재가 아니라 대화를 통하여 깨우침을 얻는 존재이다. 독자는 시적 화자인 단후와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시인과의 거리감을 좁힌다. 시가 표방하고 있는 대화체는 그렇게 시인과 독자 사이의 거리를 메꾸어 주는 역할을 감당하며 시인 일방의 교훈 전달을 막고 독자와의 소통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가령

아이고, 참외가 노랗게 잘 익었네/ -어디요? 정말 그렇네요/ 쯧쯧, 오이는 따지 않아서 늙어 버렸구나/ -어디요? 어, 그런데 왜 오이는 늙었다고 해요?/ 오냐? 그것은 말이다. 할머니처럼 쭈글쭈글해 보이면/ 늙었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익었다고 하제/-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요것 봐라, 고추는 빨갛게 매끄르르 하지야?/ 저것 봐라, 가지는 쭈글쭈글 하지야?/ 호박도 쭈글쭈글해서 늙은 것이고, /수박은 매끄르르 하니까 익은 것이고/-아하, 그렇군요
                                       -「늙는다는 것, 익는다는 것」부분

위와 같은 시에서 어른의 목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매개자인 시적 화자의 관점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아이인 시적 화자는 어른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의 대화를 통해 그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긍정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다음과 같은 시에는 시적 화자의 개입 없이 아예 아이와 어른이 주고받는 대화만으로 시가 지니는 함축의 묘를 최대한 살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아빠, 나중에 죽으면/ 바람이 되라// 갑자기 왜?// 엄마가 죽으면 바람 된댔어/ 나도 바람 될 거야/ 아빠도 바람이 돼야/ 우리 식구 다 만나지// 이 녀석이 아침부터/ 그래, 알았어
                                     -「바람」전문
 
 한편으로 이 시집에서 시적 화자는 시인과 독자를 잇는 매개자적 관점에만 서 있거나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대상을 묘사 설명하는 자리(관찰자적 시점)에만 서지는 않는다. 그는 주관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펼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내면을 나지막이 토로하기도 한다.

어제 수술한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울었다// 내 손을 꼭 잡고/ 힘이 솟는다고/ 하였다// 밥이 나오자 엄마는/ 밥을 잘 먹어야 한다고/ 수저를 건넸다// 엄마를 즐겁게 하려고/ 나는 억지로/ 먹었다// 병실에 들어선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꾸짖었다// “이녀석, 집에서는 밥을 안 먹더니!/ 병원 밥이 그렇게 맛있니?”// 아빠가 아무리 꾸짖어도/ 나는 맛없는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병원 밥」전문

 위 시에서 시적 화자는 어른의 가르침을 긍정하고 수용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깊은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의 동시가 주는 감동은 당연하게도 어른의 가르침을 매개하는 존재거나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관찰자에 머무를 때보다 이처럼 자기의 내면을 토로할 때 더 빛난다.
 

 4.
 이상권이 기존 우리 동시가 지녀온 문법과 조금은 낯선 지점에서 어린 독자들을 만나려 하고 있다면 『아기 까치의 우산』의 김미혜는 우리 동시가 이루어온 보편적인 전통에서 아이들을 만나려는 시인이다. 그는 누구보다 동시의 문법에 충실한 시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시는 결코 진부하다거나 상투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리 풀쩍/ 저리 풀쩍/ 풀쩍풀쩍/ 올챙이들/ 다 깨겠네.// 개구리/ 어른 맞아요?//낮에도 개굴/ 밤에도 개굴/ 개굴개굴/ 올챙이들/ 다 깨겠네// 개구리 어른 맞아요?
                                     -「어른 맞아요?」전문

들쭉날쭉 들쭉날쭉/ 강아지 이빨.// 전봇대 아래/ 너 혼자/ 납작 엎드려// 밤마다 밤마다/ 무얼 물어뜯고 놀았니?// 심심했겠구나/ 강아지 이빨
                                           -「민들레 이파리」전문

 시인이 시를 쓴다는 행위를 좀 단순하게 말한다면 그건 사물에 말을 붙이는 행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를 두고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은 사물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자 하는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좋은 시는 독자와 소통하기에 앞서 우선 자기가 그리려는 사물과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김미혜의 동시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사물에게 던지는 말의 자연스러움이다. 그것은 툭 트인 성격을 가진 아이가 둘레 낯선 이들에게 스스럼없는 대화를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그런 김미혜의 말 건네기는 그 자체로 이미 자신만의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말들은 “단절과 압축, 비약 등에 의존하는 특수한 말 만들기”라는 시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고양이 눈이/ 환하다./달맞이꽃이/ 환하다// 밤길이 밝다.
                                        -「여름밤」전문        

 가령 위와 같은 시에서는 전통적인 시형이 지니고 있는 기품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름밤’을 나타내는 사물들은 ‘고양이 눈’과 ‘달맞이꽃’에 불과하며 그것을 묘사하는 말들 또한 ‘환하다’는 한 가지 말에 기대고 있다. 1연과 2연 사이에 잠시 침묵이 주어지고 ‘밤길’은 그저 ‘밝다’는 진술로 끝이 난다. 그러나 이 단순 소박한 진술 속에서 우리는 달맞이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 밤길에 마실을 나선 고양이의 눈을 떠올리며 여름밤의 정취를 쉽게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김미혜는 이른바 시가 지녀야 할 ‘언어의 경제’를 잘 아는 시인인 것이다.

나풀나풀 나비를 쫓아/ 텀벙텀벙 풀밭 돌아다녔더니/종아리에 빨간 줄이 생겼어요// 풀은/ 긴 손톱을 가졌나 봐요.//바람도 낮잠 자는 여름,/ 단잠 깨웠다고 화났나 봐요.
                                     -「풀」전문

 위 시 역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시행이 돋보인다. 이런 시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김미혜의 시들에는 우리 동시가 본디 지니고 있는 단순성이 그대로 살아있다.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고도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또렷하게 표출된다. 그의 시가 지니는 이런 단순성의 미덕은 이른바 우리 삶과 결부된 사물을 다루고 있을 때도 잘 드러난다.

암만 바람 불어도/ 끄떡없어야 한다./ 흔들고 흔들어도/ 짱짱하게 맞서야 한다.// 네가 쿵, 떨어지면 할머니 가슴 무너진다.// 사과야, 힘세지?// 끝끝내/ 끝끝내/ 매달려 있어야 한다.
                                         -「태풍주의보」전문

 단순성의 미학을 확보한 채 사물에 대하여 스스럼없는 대화를 건넬 줄 아는 김미혜의 동시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는 그의 시가 바로 지금 여기 아이들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할 만한 여지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간결하면서도 시원스러운 사물에의 말 건네기는 일방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교훈주의나 알맹이 없는 말 꾸미기 동시에 적잖이 신물이 난 어린 독자들의 시선을 붙들어둘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콩벌레를 톡 치니/ 겁쟁이 녀석/ 동글동글/ 몸을 만다.// “전 까만 콩이어요./ 그냥 놔두세요.”// “시치미 떼지 마./ 넌 콩벌레야.”// 손바닥에 올려놓고/ 콩처럼 데구루루/ 데구루루 데구루루/ 데구루루 굴린다
                                      - 「콩벌레」전문

쫄깃쫄깃해서 맛있다고/ 아빠 삼촌 잘도 드시는데/ 나는 못 먹겠다.// 돼지우리에서/ 오줌똥 밟고 다니는 거/ 다 봤는데……// 발 씻었을까?// 발 냄새 콜콜 나서/ 나는 못 먹겠다.
                                         -「돼지 족발」전문

 위 시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미혜의 말법은 교훈주의나 말 가꾸기에 주눅 들지 않은 발랄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명랑성은 분명 아이들의 호흡과 생리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명랑 쾌활한 어조는 자칫 공허한 말장난의 태도에 기울 염려가 없지 않은데, 김미혜는 그런 명랑성에 걸맞은 현실감각을 다른 한편에 거느리고 있어 든든한 신뢰를 준다.      
   
수학경시대회/ 금상 받은 날// “한턱 낼게요.”/ 우리 엄마 신이 나서/ 여기저기 전화다.// “어느 학원 다녔어요?”/ “어떻게 공부했어요?”// 엄마들이/ 엄마를 인터뷰했다.
                                         -「누구 트로피야?」전문

 끝으로 김미혜 동시에서 미덕으로 꼽을 것은 주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다. 사실 사물에 대한 스스럼없는 말 건네기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시인이 사물을 그만큼 새로운 각도에서 열심히 관찰하려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크고 화려한 사물들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콩제비꽃이나 도깨비바늘, 민들레 이파리 같은 작고 여린 풀꽃들, 딱정벌레나 하루살이 같은 작은 곤충들, 까만 쫄바지나 양말, 심지어는 엄마 발에 생긴 티눈에 이르기까지 작고 소소하여 어쩌면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사물들에 그는 더욱 깊은 눈길을 보낸다. 이런 작고 여린 사물들에 보내는 눈길에서 느껴지는 온기야말로 그의 시가 지니는 진정한 미덕이다.


 5.
 우리 동시에는 신기하게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말놀이 전통이 살아나지 못했다. 언어유희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동안 쌓아온 시인들의 작업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억지스러운 말장난과 말놀이는 그 의미 자체가 다른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시란 모두 말놀이다. 시는 그야말로 ‘호모루덴스’적인 측면이 강하다. 좋은 말놀이는 대개 상투화된 언어를 휘젓고 전복시키는 힘이 있기에 참신함을 거느린다. 참신함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지만, 상투화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한번 바꾸어 준다는 의미에서 또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엄숙주의가 아직도 무성한 우리 주변에는 참신한 말놀이가 기를 펼 공간이 없다. 아직도 한 켠에서는 그저 말놀이를 ‘세계의 전복’이나 ‘몸놀림’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잔머리 굴리기의 소산쯤으로 폄하하려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오해는 아무래도 사이비 말놀이들의 공해에 시달리며 갖게 된 일종의 편견일 것이다.
 최승호는 시집의 제목에서 자신이 ‘말놀이’를 할 것임을 표방한다. 이름 하여 『말놀이 동시집』이다. 그가 자신의 말놀이 독자로 상정한 아이들은 아마도 이제 갓 우리말을 배우거나 한글을 깨우치기 시작한 유아, 유년기의 아동들이 아닐까 한다. 그는 그런 자신의 독자들에게 ‘ㅏ, ㅓ, ㅗ, ㅜ, ㅡ, ㅣ’의 6개 기본 모음과 ㄱ부터 ㅎ까지의 14개의 닿소리글자가 만나 이루는 84개의 낱말들을 시의 제목으로 뽑아 그에 어울리는 말놀이를 하나씩 펼쳐 보이고 있다. 그는 하나의 낱말에서 연상되는 또 다른 낱말을 자꾸자꾸 불러 모음으로써 하나의 말놀이를 완성한다. 이른바 유사 낱말의 연상을 통해 내적 논리를 지니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나무는 나무/ 나비는 나/ 나는 나예요// 달은 달/ 새는 새/ 나는 나예요// 나는 딸꾹/ 뻐꾸기는 뻐꾹
                                                -「나」전문

 이른바 우리의 국정교과서는 아이들에게 처음 시를 가르칠 때 ‘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하여 시 속에 들어 있는 ‘흉내 내는 말’을 찾고, 읽고, 쓰고, 그 말을 넣어 이야기를 꾸미는 단순 ‘훈련’을 반복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시 속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낱말-의성어나 의태어 같은 시늉말-을 중심으로 시를 가르치게 되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시에 흥미를 갖게 된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기본적 물음을 도외시하고 있는 생각이다. 시란 무엇보다 말의 유기적인 결합을 생명으로 한다. 교과서 시 교육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흉내 내는 말에만 초점을 맞추고 또 다른 시어들과 시어들의 단단한 결합, 시어  하나하나가 놓이는 위치의 적절성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말의 유기적인 결합이 고려되지 않은 시늉말의 반복 훈련은 교과서가 의도하는 대로 시에 대한 흥미와 아동들의 어휘력의 확대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원리를 모르고 외우는 공식처럼 얼마 가지 않아 아이들 머리 속에서 사라질 것임이 분명하다.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들은 그러한 교과서 방식을 탈피하고 있다.
 시인은 연상작용을 통하여 제목인 ‘나’라는 글자와 유사한 낱말들을 우선 선택한다. 1연에서 선택된 것은 ‘나무’와 ‘나비’다. 시인은 ‘나’자 돌림의, 의미단위로 보았을 때는 별 연관성이 없는 이 세 개의 낱말로 하나의 단단한 시적 언술을 만든다. “나무는 나무/ 나비는 나비/ 나는 나”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너무나 당연해 언뜻 싱거울 법도 한 이런 진술은 그러나 우리에게 신선한 느낌을 던져준다. 여기에는 우선 덕지덕지한 비유나 수사가 없다. 동시가 지니는 단순성의 미학은 아무래도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른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무는 나무, 나비는 나비, 나는 나’라는 이 단순 명쾌한 발언은 제목인 ‘나’와 유기적으로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나는 타자와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는 존재이다. ‘나’가 ‘너’가 될 수 있거나 ‘너’가 ‘나’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나’가 아니다. 이것을 보면 최승호의 시적 진술은 말의 연쇄를 통한 단순한 언어유희라고 보기에 어려운 하나의 단단한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다. 가령 2연에서 반복되는 “달은 달/ 새는 새/ 나는 나예요.” 또한 1연에서의 나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3연에서의 “나는 딸꾹/ 뻐꾸기는 뻐꾹”또한 어린이 눈높이에서 나와 타자를 구별하게 하는 구체적이고도 함축적인 표현이다. 아마도 아이들은 ‘나는 딸꾹, 뻐꾸기는 뻐꾹’하는 대목에서 말놀이 동시가 주는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야기와 다르게 좋은 시는 반복해 되읽는 재미가 있다. 아이들을 이런 시를 입으로 외우면서 나와 타자를 분별할 줄 아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쌓아가게 될 것이다.
 동시를 동시냐 동시냐로 구분해 보는 방식이 있다. 이분법적인 시각은 단순하기는 해도 꽤나 명쾌한 해답을 제공한다. 호사가들은 이 동시란 단 두 음절의 말에 따로 방점을 찍기를 좋아한다. 동시가 있고, 동시가 있다는 것이다. 동시를 둘로 갈라 보기 좋아하는 이들은 앞의 동시가 아이 동(童)을 강조해 아이의 현실과 처지를 고려한 시라고 일컫는다. 그럼 동시는? 동보다 시를 강조하니까 이것은 시적 예술성을 강조한 시란다. 이런 이분법적인 시각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시가 지니는 문학성을 제대로 담보해내지 못하는 유사(類似) 리얼리즘 시인들과 아동 현실(아이들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유사 모더니즘 시인들의 콤플렉스가 잠복해 있다. 자신이 쉽게 성취할 수 없는 문학적 기법과 자신이 쉽게 그려내지 못하는 아동 현실을 그들은 각기 ‘타자’화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시적 행위를 ‘리얼리즘적’ 혹은 ‘모더니즘적’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시각의 커튼 뒤에서 우리 동시의 타락이 빚어졌으며 우리 동시를 보는 시각이 고정화되었다. 메시지 전달을 앞세우는 시는 리얼리즘, 빈 껍질의 말 꾸미기를 하면 모더니즘이라는 편리한 등식이 동시를 보는 주된 시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말놀이 동시집』에서 최승호가 보여주고 있는 시들은 어떤 위치에 놓이는 시들일까?

로봇 강아지는 이가 없네/ 로봇 강아지는 혀가 없네/아무것도 안 먹는 로봇 강아지/ 똥도 안 누는 로봇 강아지/ 로봇 강아지가 짖네// 우왕우왕우왕우왕
                                        -「로봇 강아지」전문

쓰르람/ 쓰르람/ 쓰르람/ 쓰르람/ 쓰르라미는 여름 해질녘에/ 쓰르람/ 쓰르람/ 쓰르람/ 쓰르람
                                        -「쓰르라미」전문

 굳이 읽는다면 앞의 시 「로봇 강아지」는 로봇 강아지의 모습을 단순히 묘사하고 있는 시인 듯하지만, 사실 그 속에 비인간적인 ‘문명’에 대한 은근한 거부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성인시에서 날카로운 문명비판을 했던 그의 면모가 이 짧은 동시 속에도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뒤의 시 「쓰르라미」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얼핏 보아 말장난에 불과한 이 시에는 별다른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이 시를 우리 동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사 모더니즘적 작품으로 몰아 부칠 것인가. 이 시에서 하나의 내용성-가령 구전동요가 지니고 있는 ‘일과 놀이’와 관련된 구체적 몸놀림 같은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른 독자의 과도한 욕심이 아닌가 싶다. 유아나 유년기의 아동들은 말을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몸’(감각기관)으로 익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소리’의 중요성은 이 시가 지니는 의의이자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해 쓰르라미의 울음소리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이 시에서 일종의 ‘잉여’거나 ‘과잉’이 되는 것이다.

어떤 어부는 오징어 잡고/ 어떤 어부는 고등어 잡네/ 어떤 어부는 다랑어 잡고/ 어떤 어부는 망둥어 잡지// 왝! 왜가리는 붕어 잡는다
                                         -「어부」전문

 최승호는 좋은 성인시를 쓴 시인답게 새삼 소리와 말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려 한다. 단순한 말놀이를 진행 하는듯한 그의 동시에는 주도면밀하고 세밀한 시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표방한 ‘넌센스’는 막연하고 억지스러운 말장난과 차원을 달리한다. 단순히 메시지의 전달이 좋으냐 아니면 화려한 말꾸미기가 좋으냐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우리 동시단에 그의 말놀이가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는 않으리라 본다.    


 6.
 이상에서 나는 기존 우리 동시가 지니는 진부한 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느낌을 주는 네 시인을 살펴보았다. 기성 동시가 지닌 표현 방식에서 출발하였으나 어느덧 그 상투성을 버리고 개성 있는 어법으로 개펄 생물과 서민의 삶을 두루 헤아리고 있는 안학수, 구체적인 어린이 화자를 설정하여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일상의 소중함을 조근조근 일깨우고 있는 이상권, 우리 동시가 쌓아온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 지금 여기 아이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김미혜, 우리 동시가 간과해온 진정한 의미에서의 말놀이의 가능성을 선보여준 최승호는 침체되어있는 우리 동시단에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시인들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시인들의 작품이 가지는 한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개성 있는 말법을 구사하는 안학수의 작품들 가운데서 아직도 동심주의 태를 완전히 벗지 못한 작품들을 우리는 더러 만날 수 있다. 이상권이 채택한 어린 시적 화자의 말법이 안고 있는 지나친 산문화의 경향 또한 문제가 될 만하다. 어린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아무리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다하더라도 그 시적 진술 자체가 긴장감을 잃고 풀어진다면 그것을 우리는 좋은 시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동시가 전통적으로 지녀온 특질과 지금 여기 동심들의 정서를 하나로 접목시키기 위해 애쓰는 김미혜에게도 할 말은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대부분 차분하고 신선하지만 어떤 것에서는 안이한 시적 인식과 감상주의적인 한계가 느껴진다. 어린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채택한 명랑성이 지나쳐 단순한 말장난에 머무르는 것도 경계할 부분이다. 최승호의 말놀이가 채택한 ‘어휘’들은 전통성과 대비되는 지극히 모더니티한 시어들이다. 그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시어이기는 하나 모든 아이들 무의식의 지층에서 길어 올려진 친숙한 언어들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말놀이에 쓰이는 시어가 우리말이 본디 지니고 있는 원형적 자질에까지 맞닿을 수는 없을까. 가령 ‘바다’와 관련된 시어가 단지 ‘바나나보트’라는 단순한 연쇄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심층적이고 원형적인 시어를 만나는 데까지 이른다면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들은 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미처 살피지 못하여 여기에 언급하지 못했지만 올 한 해 출간된 다른 시인들에게서 또한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를 열려는 몸짓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지 소재 차원이나 표현 방식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의 방법론 측면에서 기존의 관습을 깨려는 시인들의 노력들을 세밀히 살피는 안목이 아쉽다. 동시 침체의 원인에는 새로운 길을 열지 못하는 동시인들의 책임이 우선 크다 하겠지만,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시인들의 노력을 헤아리지 못하는 비평가와 독자들에게 또한 그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어린이와 문학 2006년 1월호>

 

 

 

 

 

출처 : 물꼬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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